19대 대선을 앞두고 마지막 촛불집회인 ‘광장의 경고! 촛불 민심을 들어라! 23차 범국민행동의 날'이 4월29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한국 최대의 좌파 학술문화행사인 제8회 ‘맑스코뮤날레’가 12~14일 서울 성공회대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혁명과 이행’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올해가 ‘촛불혁명’의 원년인데다가 러시아혁명 100년, 6·10민주항쟁 30년 등 굵직한 혁명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해인 것을 반영했다. 메인세션의 발표들만 따로 모아 단행본 <혁명과 이행-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21세기 이행기의 새로운 혁명 전략>(한울)도 펴냈다.
제8회 맑스코뮤날레 메인세션 발표들을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혁명과 이행>.
현대정치철학연구회는 12일 ‘주권과 민주주의’란 제목의 세션을 열었다. 이 세션에서는 주로 ‘대표’의 문제 등 ‘촛불혁명’이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라는 결과물을 낳은 현재, 우리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고민들이 논의됐다.
첫 발표를 맡은 진태원 교수(고려대 민족문화원)는 <황해문화> 89호 기고에서 제기한 바 있는 ‘을의 민주주의’ 화두를 좀 더 벼려서 내놨다. 비정규직 노동자, 프랜차이즈 가맹점 아르바이트 등 우리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을’은 ‘갑을관계’에서 나온 말인데, 진 교수는 이것이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몫 없는 이들’(정치에서 배제된 이들)과 가까운 개념이라 보고 ‘을’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가 가능한지 모색한다.
진 교수는 링컨의 경구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민주주의’를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로 재해석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의 위협에서 ‘을’을 보호·배려하는 것은 ‘을을 위한 민주주의’가, ‘을’의 목소리와 의지가 잘 ‘대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을에 의한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진 교수는 ‘대표’ 개념을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해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재-현’(re-presentation)”이라고 풀었다. ‘재-현’의 대상으로 ‘을’을 고민하면, 결국 ‘을’이 어떤 정치적 주체냐고 묻는 ‘을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진 교수는 “기존 권력이 ‘국민’ 대신 ‘을’을 주권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의 목표”라고 제시했다. 다만 ‘을’은 항상 ‘병’이나 ‘정’ 등 또다른 위계 관계를 내포하는 등 이미 그 내부가 동질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복수적이란 측면에서 계급, 민중, 소수자 등의 주체 개념과 구분된다. “때론 ‘을’이 ‘갑’이 되고 ‘갑’이 ‘을’이 되는 등 고정되어 있지 않은 관계성”이 핵심이다. 때문에 ‘을’이 내포하고 있는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어떻게 해체하거나 축소할 수 있는지가 ‘을의 민주주의’의 과제가 된다.
또다른 발표자 홍철기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역시 ‘대표’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동안 ‘대표’라는 말은 ‘대의제’와 엮여서 직접·참여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홍 연구원은 이 단어를 언어적·개념적으로만 살펴보면 “지금 여기 있지 않은 사물이나 사람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만든다”(‘재-현’)는 뜻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곧 ‘간접 대 직접’ 등 양극화된 생각이나 ‘선거적인 대표’에 붙들리지 않으면, ‘대표’(‘재-현’)란 말로부터 더 많은 정치철학적 자원을 발견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통령 후보가 성소수자 차별 발언을 했을 때, 이에 대한 항의에 나선 사람들은 선거로만 환원되지 않는 ‘재-’현’으로서의 ‘대표’를 보여준 셈이다. 홍 연구원은 “‘한 가지 방식(선거)으로만 ‘대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극복하면, 당사자(정치적 주체)를 구성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다양한 자원을 발견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홍철기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본인 제공
전반적으로 ‘촛불혁명’ 뒤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을 지나온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이 스몄다. 진 교수는 지난해 수많은 ‘을’들이 촛불을 들고 나섰지만 점차 운동의 동력이 약화됐고, 결국 선거라는 “제도의 시간”이 찾아온 현상을 고민해봐야 할 대목으로 짚었다. “주권자가 사실은 주권자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과연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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