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며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독일국가관 내부의 퍼포먼스 장면. 관객들이 발을 디딘 유리판 아래로 배우들이 기어가면서 절박한 몸짓을 연출하고 있다.
“독일, 그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찾을 수 없어요.”
1786년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자신의 시에서 낙심한 어조로 읊었다. 100개 넘는 제후국과 도시국가로 사분오열된 당시 독일의 현실이 그의 앞에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1871년 독일은 통일돼 제국주의 강국이 됐지만 1,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실러의 시대로부터 230여년이 지난 지금 독일은 다르다. 정치·경제적으로 유럽의 맹주가 되어 재기했을 뿐 아니라 문화강국이 됐다. 특히 2017년 세계 미술계에서 독일은 명실상부한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5월 개막한 제57회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11월26일까지)이다. 독일은 국가관과 개인작가에게 주어지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2개를 휩쓸었다.
작가 안네 임호프(39)가 선보인 독일관 출품작 ‘파우스트’는 베네치아의 가장 빛나는 신작이었다. 나치 시대에 지은 천장 높은 공간을 건축적으로 절묘하게 변용하면서 시대의 위기적 징후를 몸짓과 춤, 노래 등으로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의 행위예술을 선보여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증폭되는 세계화 시대의 대중정서를 적확하게 집어냈다는 호평이 잇따랐다. 개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노장 프란츠 에르하르트 발터(78)도 몸을 움직여 천을 꿰매거나 이어붙이는 감성적 바느질 작업으로 개념미술과 행위예술이 녹아든 시각예술의 새 영역을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네치아와 쌍벽인 세계 최고의 미술제 2개도 10여년 만에 독일에서 동시에 열린다. 10일부터 중부의 소도시 카셀에서 4년 만에 카셀 도쿠멘타 14(9월17일까지)가, 대학도시 뮌스터에서는 세계 공공미술의 가장 큰 잔치인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10월1일까지)가 개막한다.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발언을 중시하는 카셀 도쿠멘타는 스타 큐레이터 아담 심치크가 ‘아테네에서 배운다’를 주제로 유럽의 정치·사회·문화의 모델이 된 그리스 아테네(4월 개막, 9월17일까지 전시)와 카셀 두 곳에서 세계 정치·문화의 남북 대립 문제를 화두로 전시를 준비해 화제다. 올 연말까지 독일의 작품과 미술담론들이 세계 미술계를 휩쓸 참이다.
전문가들은 독일 미술의 초강세가 크게 두가지 배경을 깔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사회적 맥락의 토론을 중시하는 미술교육의 탄탄한 전통과 1990년 동서독 통일 이래 더욱 개방적으로 세계 시각문화를 수용한 국가와 지자체 미술정책이 그것이다. 독일에서 유학한 작가 안규철씨와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은 수작업 기술보다도 철저히 토론 위주로 움직이는 교육 시스템의 저력이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짚었다. 안 작가는 “68학생혁명 당시 입시 철폐를 부르짖은 요제프 보이스의 항의 퍼포먼스 이래로 세계 혹은 유럽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미술이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 중심의 교육 시스템이 독일 미술의 든든한 자산이 되고 있다”며 “학교 분위기가 권위적이지 않고 스승과 제자가 동료 예술인으로서 동등하게 담론을 공유하는 전통이 강점”이라고 짚었다. 백 부장도 “카셀 도쿠멘타 등 자국에서 열리는 미술 행사들의 과거 전시 작품과 담론들이 미술교육기관의 가장 주된 교육 텍스트로 자리잡아, 행사들의 공과를 집중논의하면서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것도 독일 미술이 저력을 쌓은 요인”이라고 했다.
68학생혁명기와 70년대 독일의 사회적 미술을 주도한 요제프 보이스의 작업공간 모습. 독일 보도사진가 바바라 클렘이 찍은 사진의 일부다.
통독 이후 미술지형 변화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통일 뒤 수도로 리모델링된 베를린은 세계 각국 미술가들의 메카가 됐다. 시 당국이 저렴한 집값과 박물관, 미술관 등의 탁월한 문화 인프라를 내세워 각국 미술가들을 적극 수용하고 이들의 창작 기반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세계 곳곳의 기획자, 컬렉터, 대가들이 모이는 플랫폼이 됐고, 이런 베를린의 변화가 독일 미술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물꼬가 됐다. 과거 나치 시대 예술억압의 어두운 역사를 성찰하면서 표현주의, 바우하우스, 신표현주의 같은 독일 특유의 미술사조들을 사회적 맥락에서 끊임없이 복기하고 재검토하는 관행도 빼놓을 수 없다. 안규철 작가는 “블랙리스트로 작가들에 대한 기본 창작지원이 검열 대상이 되고, 지자체가 과시성 전시공간 신축부터 하는 국내 미술판의 제도적 난맥상들을 보완하기 위해 독일 미술모델에 대한 진중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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