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팔라초 그라시 전시장 중정에 설치된 데이미언 허스트의 목 없는 거대 괴인상.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허스트는 거대 미술패션 자본가 프랑수아 피노의 천문학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베네치아에 신기루 같은 작품들의 만신전을 세워놓았다.
2000년대 이후 세계 미술판은 경매사와 패션, 금융사를 거느린 거대 미술자본, 다국적 대형 화랑들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이들은 비엔날레 등의 국제 미술제에 행사·출품작 제작 비용을 대규모로 ‘투자’하고, 전위적 작품들의 창작까지 주문하면서 마음껏 유행을 창출해낸다.
올해 함께 열리고 있는 베네치아 비엔날레(11월26일까지), 카셀 도쿠멘타(9월17일까지)에서도 이런 흐름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베네치아의 경우 대자본의 미술 마케팅장으로 변한 지 오래다. 국가관, 본전시 출품작들마다 미술자본들이 건립한 특정 파운데이션(예술재단), 특정 화랑이 제작을 후원했다는 문구가 대부분 표찰에 붙어 있다. 특히 올해엔 구치 등의 패션업체와 크리스티 경매사를 거느린 프랑스 재벌 프랑수아 피노와 손잡고 영국 대가 데이미언 허스트가 벌인 초대형 기획전(12월3일까지)이 비엔날레를 능가하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 700억원 넘는 거액이 들어갔다는 이 기획전 작품들은 비엔날레 출품작이 아닌데도 비엔날레 최대 화제작이라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다. 피노의 소유인 대운하 끝 푼타델라도가나와 안쪽의 팔라초 그라시 전시장에서 막을 올린 허스트의 전시는 ‘난파선에서 건져올린 믿을 수 없는 보물’이란 제목이 붙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대형 인물, 괴수상들과 가짜 컬렉션들로 가득 채워져 애호가들의 시선을 다잡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개막 직전인 5월11일 리알토 다리 부근의 어시장에서 열린 이 전시의 개막 파티는 애니쉬 카푸어와 제프 쿤스 같은 현대미술 거장들과 세계 각지의 유력 컬렉터, 명문화랑업주들이 줄줄이 참석한 가운데 초호화판으로 치러져 또다른 화제를 모았다.
스위스의 세계 최대 미술품 장터인 바젤 아트페어는 화랑들의 부스 판매전 외에 특별기획전인 언리미티드를 매년 치르고 있는데, 그 내용이 비엔날레를 뺨칠 정도로 실험적이다. 2년 전에는 팔릴 만한 소재가 아닌 퍼포먼스 작품들을 대거 내놓더니, 올해 행사(6월15~18일)에는 인도의 인기 작가 수보드 굽타가 대형 레스토랑을 차려 요리를 제공하는 이색 퍼포먼스를 벌여 관객몰이를 했다.
이런 양상은 정치적 미술, 작가주의의 본산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독일 카셀 도쿠멘타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해 카셀 전시장에는 주요 작가 출품작들에 다국적 화랑들과 파운데이션의 경비 지원이 노골화하면서 표찰에 이들의 이름이 다수 등장했다. 카셀은 68학생혁명의 전위정신을 받아들여 사회적 미술을 부르짖은 거장 요제프 보이스, 창작 과정 일체를 전시화한 천재기획자 하랄트 제만의 혁신주의를 키운 요람이었는데, 올해는 미술 자본의 공세에 맥을 못 추는 분위기다. 반발한 일부 작가들은 자비로만 작품을 제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작가들이 동인집단을 이루고 유파를 형성하면서 미술사를 주도했던 지난 세기까지의 흐름은 이제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건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지만, 미술 자본과 연줄이 닿는 것 또한 세계 무대에서 뜨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여겨지게 됐다. 공공미술관, 대안공간의 작가와 기획자들은 줄을 잘 서야 살아남는다는 절박감 속에 사교 마당으로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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