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겨울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하야 하야 하야~”라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하야가’였다. ‘하야가’는 1956년에 나온 ‘아리랑 목동’(강사랑 작사, 박춘석 작곡, 박단마 노래)을 개사한 노래다. ‘아리랑 목동’은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2008년 올림픽 때도 광장에서 떼창으로 불렸다. 사진은 <오아시스 레코드>의 <아리랑 목동> 음반. 김광우 실버라디오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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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성공회대 대우교수. 대중예술이란 창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다시 광화문에서>를 냈다.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 <요즘 왜 이런 드라마가 뜨는 것인가> 등 20여권의 대중예술 관련 책을 썼다. 격주 연재
광화문 시대가 시작됐다. 새 대통령이 광화문에서 집무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준비가 분주하고, ‘광화문1번가’를 설치해 국민들로부터 온라인으로 정책 제안을 받고 있다. 광화문 광장 전체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 안이 검토되고 있고,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한 서울역사문화벨트 조성 사업도 화려하게 시작되고 있다. 광화문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뜨거운 공간이 되었다.
이런 변화가 지난겨울을 뜨겁게 달군 광화문 광장의 촛불혁명 때문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광화문 일대의 공간이 지닌 중요성은, 그 역사적 뿌리가 그리 짧지 않다. 하필 광화문 광장이 촛불혁명의 장소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공간뿐 아니라 모든 문화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결과이다.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불린 노래 한 곡만 들춰보아도 금방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후렴) 하야 하야하야 하야하야 하야하
1. 순실이를 옆에 끼고 말아먹은 박근혜야/ 거짓사과 오리발로 제아무리 버텨도/ 동네방네 일어서는 국민들을 이길소냐/ 내려와라 당장/ 하야하라 당장/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려나주세
수많은 ‘하야가’ 중에서 가장 사랑받은 노래가 바로 이 ‘아리랑 목동’ 개사곡(여러 버전이 있는데 위의 가사는 그중 하나)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의 대다수는 원곡의 ‘야야 야야야야’, ‘꽃바구니 옆에 끼고’, ‘몽매간에 생각 사(思)자’의 가사가 ‘하야 하야하야’, ‘순실이를 옆에 끼고’, ‘동네방네 일어서는’으로 절묘하게 바꾸어놓은 새 가사를 어쩌면 이렇게 입에 착착 붙냐 싶은 생각에 웃으며 신나게 따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대중예술 연구자는 이 촛불혁명에 불려나온 노래가 하필 ‘아리랑 목동’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고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2016년 12월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 광장촛불콘서트'에 참여한 시민들이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근혜 즉각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촛불집회 기간 광장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아리랑 목동’을 개사한 ‘하야가’였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불후의 역전 노장급 응원가
이 노래의 원곡 ‘아리랑 목동’은 1956년 가수 박단마가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로, ‘감격시대’, ‘굳세어라 금순아’의 작사가 강사랑이 가사를 쓰고, 경기고와 서울대 음대를 거친 26살의 박춘석이 작곡했다. 길옥윤, 이봉조 등 같은 또래 작곡가들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히트곡을 내놓기 시작한 것에 비해, 박춘석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쳤고 1950년대 중반부터 히트곡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여전히 트로트의 시대였던 1950년대 인기 경향을 드러내듯 ‘비 내리는 호남선’ 같은 트로트에서부터 안다성의 ‘사랑이 메아리 칠 때’, 패티김의 출세작 ‘초우’ 등 스탠더드팝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아리랑 목동’은 1950년대의 ‘핫한’ 트렌드였던 민요조에 스윙재즈나 라틴음악을 섞은 1950년대 스타일의 신민요이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미국 대중음악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1950년대는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스윙재즈, 블루스 등), 아프로쿠반 음악(흔히 라틴음악이라 부르는 차차차, 맘보, 룸바 등)이 크게 인기를 모았던 시기였고, 소설 <자유부인>(1954)이 소재로 삼은 사교춤 역시 이러한 음악의 유행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니 무려 60여년 전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60년대 이후 체육경기의 응원가로 널리 불렸다. 연세대의 대표 응원가가 된 것이다. 연세대와 고려대 두 학교의 정기전이 끝난 날 명동에 합류해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은 그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광화문 부근 술집까지 ‘진출’해 고래고래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두 학교의 응원은 한국 스포츠의 응원 문화의 원형이 되었고, 이들 학교의 인기 응원가는 프로스포츠 시대에도 널리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양강 처녀’, ‘아파트’ 같은 ‘불후의 응원가’들이 속속 합류했지만, 역전 노장급인 ‘아리랑 목동’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급기야 이 노래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2002년 월드컵 응원까지 달구었다. 2006년 월드컵 때에는 코요테가, 2008년 올림픽 때에는 노브레인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취입할 정도로 이 노래는 몇 년에 한 번씩 광화문 광장에서 불렸다.
그러니 ‘아리랑 목동’과 광화문 광장은 이미 여러 번 뜨겁게 만나본 셈이다. 응원가였던 이 노래가 2016~17년에 하야가로 재탄생한 것은 큰 반전이긴 하지만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집단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필요해질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사적 경험 속에서 적절한 노래를 호출해 새롭게 가공해 부르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노래 하나의 역사가 보여주는 켜가 이렇게 층층이 두꺼울진대, 광화문과 세종로라는 공간의 역사적 의미는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광화문 앞 세종로는 늘 뜨거워졌고,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이미 몇백년 전부터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2008년 광화문 광장 조성을 위해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을 파헤쳤을 때 역사 연구자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탄탄한 콘크리트 밑에 묻혀 있던 육조(六曹)거리가 나타난 것이다. 콘크리트 포장을 한 표층부터 자연이 만들어놓은 밑바닥의 지층까지 무려 8미터였다. 자연층 위에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임진왜란 즈음, 경복궁 중건 시기, 그리고 20세기 이후까지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조선시대의 육조거리 흔적부터 1968년에 사라진 전찻길의 흔적까지 켜켜이 나타난 것이다.
“잣다온뎌”(도성답도다) 자랑한 광화문
육조거리는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대문인 광화문 앞부터 당시 황토마루라 불렸던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길을 가리킨다. 이성계가 1394년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바로 경복궁 공사를 시작하여 1395년 말에 경복궁에 들어왔다. 남북으로 뚫린 이 길은 폭이 무려 17미터이다. 현재 광화문 광장 폭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당시에는 조선 팔도에서 가장 넓은 길로 어가(御街)의 위용을 자랑했다.
‘아리랑 목동’이 세종로 콘크리트층에 배어든 노래라면 다음의 노래는 그 아래의 어느 켜에 스며들어 있는 노래이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 산천이 밝아온다/ (후렴) 에 에헤 에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에
을축 사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하세/ (후렴)
우광쿵쾅 소리가 웬 소리냐 경복궁 짓는 데 회(灰)방아 찧는 소리다/ (후렴)
조선 여덟도 유명한 돌은 경복궁 짓는 데 주춧돌감이로다/ (후렴)
경복궁 역사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속(家屬)을 만나나 볼까/ (후렴)
수락산 떨어져 도봉이 생기고 북악산 줄기에 경복궁 짓네/ (후렴)
광화문 앞 세종로는 조선 초부터 폭 17미터로 조성된 육조거리로서 새로운 왕조의 위용을 자랑했다. 사진은 2008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광화문권역 발굴 현장에서 고종 때 새로 만들었으나 일제가 허문 용성문 터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경기민요인 ‘경복궁타령’으로, 고종 집권 초기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나온 민요라 알려져 있다. 가사에서처럼 수락산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도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줄기는 다시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북한산(삼각산) 백운대로 이어진다. 그 바로 남쪽의 다소 작은 산이 북악산이다. 이 북악산을 등받이 삼아 세운 궁궐이 경복궁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울을 보면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의 지형이 두 겹으로 선명히 포착된다. 작게는 북쪽의 북악산에, 좌청룡과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이 놓여 있다. 낙산은 창신동 북쪽부터 이화동·동숭동까지의 산인데, 지금은 산이라고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인왕산은 독립문과 홍제동 사이의 산으로 낙산보다 훨씬 험해 아직도 산의 위용을 보이고 있다. 경복궁의 남쪽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그 너머에 부드러운 토산(土山)인 남산이 마치 책상처럼 놓여 있다(이런 산을 안산(案山)이라 한다). 좌청룡우백호와 배산임수, 주산(主山)과 안산의 구도가 완벽하다.
박춘석의 1956년산 ‘아리랑 목동’
촛불혁명때 ‘하야가’로 최고 인기
2002 월드컵때도 광화문서 불려
우연 아닌 필연적 대중 ‘문화 호출’
광화문 첫 노래 정도전 ‘신도가’
좌청룡우백호 완벽한 지형 자랑
고종때의 경기민요 ‘경복궁타령’
일꾼의 고역 등 서민 역사도 담아
그런데 더 크게 보면 북악산과는 비할 바 없이 높고 험한 북한산이 등 뒤에서 버텨주고 있고 좌측으로 아차산, 우측으로 망월산으로 연결되는 산자락이 둘러싸고 있다. 남쪽에 거대한 강인 한강이 흐르고 그 너머에 커다란 관악산이 놓여 있다. 관악산의 불기운(화기·火氣)이 하도 강해 광화문 앞에 해치 상을 놓고 남대문인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달아 불꽃 형상의 숭(崇)의 불기운으로 관악산 화기에 맞불을 놓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정도전의 ‘신도가’(新都歌)에서 ‘알픈 한강수여 뒤흔 삼각산이여’(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고 노래한 그대로이다. 이렇게 서울은 이중분지의 지형 속에 놓인 도시이다. 이 지형을 보고 있노라면 정도전이 ‘신도형승(新都形勝)이쟨다’(새 도읍의 지형이 뛰어나도다), ‘잣다온뎌 당금경(當今景) 잣다온뎌’(도성답도다 지금 이 풍경 도성답도다)라고 감탄한 ‘신도가’의 가사가 결코 상투적 표현이 아니다 싶다.
경복궁의 동서쪽으로는 좌묘우사(左廟友社)의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을 배치했다. 좌측인 동쪽에 조상신들을 모시고 우측인 서쪽에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신 것이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경복궁은 이 구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후 세워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 다른 어느 궁궐도 경복궁 같은 완벽한 균형점에 위치한 궁은 없다.
조선 후기인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한양 도성도(都城圖, 47.0×66.0㎝). 동국여도(東國輿圖)에 포함돼 있으며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남쪽으로 한강, 북쪽으로 북한산, 서쪽으로 양화진, 동쪽으로는 살곶진까지를 포함한다. 연합뉴스
마침내 열린 ‘광화문 시대’
육조거리는,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겠다는 의미의 근정전(勤政殿)에서 궁궐 대문인 광화문을 나와 두 마리의 해치 상을 지나자마자 남쪽으로 펼쳐진다. 의정부, 육조, 한성부 등 주요 관청들이 자리 잡은 곳이어서 육조거리라 불렸다.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는 예조, 그 맞은편에 의정부 건물이 있었고, 미국문화원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옛 문화부) 자리에는 한성부, 그 맞은편에 사헌부와 병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육조거리의 끝은 종로로 이어진다. 종루(鍾樓)가 있는 길이란 뜻으로, 종가(鐘街), 운종가(雲從街)라고도 했다. 바로 상인들의 터전이 이곳이다.
이렇게 14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광화문이 불타 250년 동안 방치되기도 했고, 국격을 세운다며 대원군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다가 가뜩이나 망가진 나라 경제를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에 잠시 들어와 살던 고종이 이곳을 떠나면서 조선조는 결정적으로 기울어 패망했고, 급기야 조선총독부가 서고 광화문이 해체되었다. ‘광화문통’이란 일본식 거리 이름으로만 광화문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던 시대가 수십 년 이어졌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때 한글 현판을 단 광화문이 세워졌고, 문민정부 시대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되고 지금의 목조 건물 광화문이 제 위치에 놓이기까지 이곳의 역사는 고스란히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긴 세월의 역사는 광화문 광장의 땅 아래에 켜켜이 쌓여 있다.
2017년 바로 이곳에서 세 번째 시민혁명을 통해 탄생한 정부가 ‘광화문1번가’의 정치를 펴겠다고 하고 있다. 이런 땅 힘을 가진 곳이 대한민국을 통틀어 다시 없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오는 겨울밤을 하필 이곳에서 보내게 된 것은 바로 이 엄청난 땅 힘 때문이 아닐까. 그뿐일까. 아마 태극기 부대의 시위가 시청앞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전진하며 세종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2017년에는 이 두 시위가 같은 평면 안에 위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수직으로 켜켜이 쌓인 역사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대중예술사 속에서도 확인된다. 앞서 맛본 몇 노래에서 확인되듯, 광화문과 세종로는 이렇게 서민대중들이 즐겼던 노래와 공연, 영화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신도가’는 가장 아래층에, ‘경복궁타령’은 중상층에, 그리고 ‘아리랑 목동’은 표층에 뒤얽혀 있는 노래인 셈이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대중예술사를 통해 보는 광화문·세종로 이야기는 이렇게 켜켜이 쌓인 역사를 서민대중들의 삶과 감수성 속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차근차근 그 켜를 들춰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