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불군과 터키군 사이에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갈리폴리 해협. 중간의 해협을 경계로 아래쪽이 소아시아 차나칼레이고, 건너편이 유럽 쪽 갈리폴리 반도다.
터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나톨리아(소아시아)는 인류사의 발자취가 켜켜이 포개진 땅이다. 히타이트, 그리스·로마, 비잔틴, 오스만 튀르크 등 숱한 제국이 명멸했던 인류 문명사의 고향이자, 동서 실크로드 문명 교류가 펼쳐진 주된 무대였다. <한겨레>는 올해 한국-터키 수교 60돌을 맞아 두 나라 정부가 공동 기획한 학술프로젝트 ‘아나톨리아 오디세이’를 동행취재했다. 16~26일 한국의 역사인문학자들이 소아시아 일대의 고대문명 유적을 답사하며 현지 학자들과 대화를 나눈 일정이다. 쳇바퀴 돌듯 되풀이되는 전란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공생을 지향하는 인간의 고귀한 의지와 신념이 문명의 교류와 확산을 이끌어내는 끌차가 되었다는 깨달음을 안겨준 열흘간의 여정을 다섯 차례에 걸쳐 매주 연재한다.
하늘과 바다와 땅을 메운 것은 휭휭거리는 바람이다. 강풍 속에서 간신히 몸을 가누며 뱃전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한강보다 조금 넓은 해협의 검푸른 물살이 흘러간다. 멀리 완만한 산야의 누런 능선이 해협 물살과 나란히 앞으로 치닫는다. 터키의 서쪽 끝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갈리폴리(터키어로는 ‘겔리볼루’) 반도다.
17일 한국 답사단이 트로이로 가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타고 남서쪽으로 네댓시간 달려 도착한 갈리폴리 반도의 항구 겔리볼루의 하늘은 찌푸린 먹빛이었다. 포구에서 맞은편 소아시아 대륙의 랍세키항으로 향하는 페리선에 몸을 싣고 30여분 해협을 가로질렀다. 에게해로 통하는 좁은 바다는 물빛이 맑은 청정수역. 주변 양안의 풍광도 뛰어났다. 하지만 경치를 마냥 즐기기엔 왠지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가 눈을 짓눌렀다.
트로이 길목인 갈리폴리 반도는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건국기반을 닦은 전란의 땅이다.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50만명 이상 전상자를 낳은 갈리폴리 공방전이 1915년 2~12월 벌어졌다. 당시 연합국 주축이던 영국은, 갈리폴리 해협을 지나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루스 해협, 흑해로 이어지는 우방 러시아와의 연결로를 확보하기 위해 육해군을 동원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땅인 갈리폴리 반도 점령을 시도했다. 풍전등화에 처한 오스만 제국의 구세주로 등장한 이가 ‘터키 건국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다. 그는 보급이 엉망이고 훈련도 덜 된 군대를 독려해, 산악지대인 반도 끝과 북쪽에 상륙을 꾀한 영국·프랑스군 공격을 백병전으로 막아냈다. 아홉달 혈전 끝에 반도를 사수했지만, 연합군과 튀르크군 장병들이 각각 25만명이나 희생됐다. 이 무모한 작전을 세운 영국 해군장관이 2차 대전 당시 영국을 구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 처칠과 케말의 지략이 부딪힌 전장의 원혼들이 해협을 지금도 떠돌고 있는 것이다.
랍세키에서 1차 대전 당시 요새가 있는 주도 차나칼레를 지나 트로이로 이동했다. 50여분 뒤 도착한 유적 들머리엔 70년대 세운 높이 9m의 트로이 목마 모형이 맞았다. 성벽과 극장, 주거지, 수로, 신전 터 등이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 흩어진 트로이 유적은 기원전 약 3000년께부터 13세기 비잔틴시대까지 10개 층의 도시, 마을터 층위가 켜켜이 쌓인 복합유적. 현재 흙이 퇴적돼 바다와 6㎞ 이상 멀어졌고, 호메로스(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묘사한 기원전 12~11세기 전쟁의 스펙터클한 흔적도 찾기 어렵다. 뤼스템 아슬란 유적 발굴단장(차나칼레 3·18대학 교수)은 “옛적 트로이는 아프가니스탄의 고급광물인 청금석(라피스라줄리)과 흑해 일대의 구리, 이집트산 밀 등이 오갔던 천혜의 교역항으로 그리스인들의 쟁탈전과 지진, 해일 등으로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면서 지층이 쌓여 언덕 같은 유적이 형성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로마시대 아고라와 청동기 유적에 대한 발굴을 진행중인데 지금도 여기서 나지 않는 청금석이 간간이 출토된다”고 했다.
트로이 수호신 아폴론의 신전 기둥이 남은 히사를리크 언덕 꼭대기에 올랐다. 트로이에 교역선을 몰고 오게 한 계절풍이 몰아친다. 아래엔 올리브 나무 흩어진 평원과 에게해의 아득한 조망이 펼쳐졌다. 아슬란의 설명을 들어보니, 트로이의 실체를 19세기 말 처음 찾아내 알렸다는 독일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의 전설은 실제 사실과 큰 거리가 있다. 그는 트로이 전쟁 유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2층위의 트로이계 유적을 처음 확인했지만, 기원전 2500~2200년대의 이전 청동기시대 것이며, 기원전 1200년께 전쟁터는 20세기 초 후대 학자들이 발굴한 7층위 유적으로 거의 굳어졌다. 게다가 슐리만은 트로이의 황금 장신구류, 왕관과 도자기 유물들을 혼자 발굴해 독일로 빼돌렸다. 이른바 ‘프리암(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로 불리는 이 컬렉션은 독일 베를린 국립박물관에 소장·전시되다,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강탈했다. 90년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소장된 사실이 확인된 뒤 두 나라가 반환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트로이 유적지인 히사를리크 언덕의 옛 성터를 답사 중인 한국 답사단. 트로이 유적은 선사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9개 층위의 유적으로 나뉘는데 이 성터는 2층위의 것이다. 5m 간격으로 지진에 견디는 돌출벽을 설치한 이성벽에서 슐리만은 프리암의 보물들을 발굴했다. 그러나 실제 트로이 전쟁 유적은 7번째 층위에 있는 것으로 후대 판명됐다.
유럽 각지 연구자들이 100여년간 집중발굴한 트로이 유적은 아직 역사적 실체가 확실치 않다. 호메로스 서사시와, 트로이와 교역한 고대국가 히타이트의 점토판 기록에 ‘일리오스’ 국명이 나온 것 말고는 명쾌한 기록이 없다. 후대 그리스, 로마·비잔틴 유적이 위에 덮인 것도 조사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다. 아슬란은 “청동기시대 무덤이 전혀 나오지 않은 점도 미스터리인데, 언젠가 발굴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차나칼레 주는 관할 트로이의 세계유산 지정 20돌인 내년에 종합박물관 완공을 목표로 건물을 짓는 중이다. 3층 전시관에 세계 44곳에 흩어진 트로이 보물들을 한곳에 모으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주정부 쪽은 “프리아모스 보물 반환이 난제로 남아 있지만, 국제 협력을 통한 유물 반환의 전범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트로이 유적지 들머리에 복원된 높이 9m짜리 트로이의 목마상.
차나칼레와 갈리폴리는 이제 숱한 전란의 역사를 넘어 평화와 화합의 무대로 재조명되고 있다. 73년 터키 정부는 반도 남쪽 끝에, 참전했던 튀르크와 영국, 영연방인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전몰자들을 함께 기리는 추모공원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우리 모두의 아들’이란 케말의 인상적인 글귀를 추모비에 새긴 공원은 승패를 떠나 참전국 유족과 관광객들이 모두 찾는 명소다. 매년 4월25일, 1만㎞ 이상 떨어진 호주·뉴질랜드 국민들이 ‘앤잭’(ANZAC)군으로 통칭되는 양국 전몰장병들을 추모하러 모여든다. 올해 3월엔 해협 양안을 잇는 길이 2023m의 차나칼레 대교가 한국 기업 시공으로 착공됐다. 갈리폴리는 21세기 화해 평화를 상징하는 실크로드의 가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쟁 참화에도 여전히 남북 희생자들을 같이 추모하지 못하는 한반도 현실과 대비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차나칼레/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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