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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4·19 세례받아 대중예술을 품다

등록 2017-08-25 19:51수정 2017-08-26 10:26

[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5) 서울시민회관
현재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은 원래 1955년 이승만 대통령 때 그의 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추진됐으나, 4·19 혁명을 거친 뒤 이름이 바뀌어 1961년 개관했다. 이곳은 대통령 취임식 등 정부 행사뿐 아니라 각종 예술공연의 무대였다. 특히 인기가수 콘서트 등 대중예술에도 문호를 활짝 열었다. 사진은 1972년 12월 화재로 불타고 있는 서울시민회관의 모습. ‘e영상역사관’ 제공
현재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은 원래 1955년 이승만 대통령 때 그의 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추진됐으나, 4·19 혁명을 거친 뒤 이름이 바뀌어 1961년 개관했다. 이곳은 대통령 취임식 등 정부 행사뿐 아니라 각종 예술공연의 무대였다. 특히 인기가수 콘서트 등 대중예술에도 문호를 활짝 열었다. 사진은 1972년 12월 화재로 불타고 있는 서울시민회관의 모습. ‘e영상역사관’ 제공

먼저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다음 세 단어의 공통점은? ‘시민, 세종, 우남’.

답은 옛 주소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81-3에 세워진 건물의 이름이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건물의 이름이 1961년에 준공된 서울시민회관이며, 1955년 계획될 때 이 건물의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한 우남회관이었다.

세종로 거리에 커다란 공연장을 짓는데 대통령의 호를 갖다 붙이는 발상이 그때는 낯설지 않았다. 지지난 회에서 80살 생일을 기념하여 1955년 ‘우리 대통령’ 동요를 지어 어린이들에게 부르게 한 이야기를 한 바 있는데, 팔순 기념이 그것뿐이 아니었다. 탑골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는데 예정보다 약간 늦어져 이듬해 3월에 완성되었다. 우남회관 건립의 계획이 세워진 것도 같은 해였다.

설계자 이천승(1910~1992)은 당대 건축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경성고등공업학교(약칭 ‘경성고공’. 다른 공업학교들이 중등교육기관인 것에 비해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중등교육 이수 뒤에 입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날개>, <오감도>를 쓴 이상도 경성고공 건축과를 졸업했다)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10년을 근무하며 다롄역사(大連驛舍)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남긴 인물이다. 1950년대에 그는 대한건축작가협회를 이끌었고 건축 관련 법규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국제극장(1957), 신신백화점(1956) 등을 설계했다. 북편에 높은 탑을 세우고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만든 현대적인 다목적회관으로 당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서는 국내 최고의 고층건물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국제극장, 1960년대 초에 시민회관에 이어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경제기획원 쌍둥이 건물이 세워짐으로써 1960년대 초 세종로 부근 풍경은 몇 개의 대형건물로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다.

하지만 당시 20억 환이나 들여 만든 이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고, 시민혁명을 거치며 건물 이름도 우남회관에서 서울‘시민’회관(이하 ‘시민회관’)이 되었다. 1961년 11월에 개관했으니 정권은 또 한 번 바뀐 후였다. 이곳에서 온갖 행사를 개최한 대통령은 이승만도 윤보선도 아닌 박정희였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첫 취임식도 이곳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의 ‘시민회관’
이승만 때 ‘우남회관’ 계획됐다가
4·19혁명으로 이름 바꿔 개관
각종 공연·정부행사 단골 개최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기 위해 선포했던 10월 유신 이튿날인 1972년 10월18일 서울시민회관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탱크 한 대가 시민회관 계단위에 올라가 경계를 펴고 있다. 시민회관은 그로부터 한달여 뒤 화재로 전소됐다. ‘e영상역사관’ 제공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기 위해 선포했던 10월 유신 이튿날인 1972년 10월18일 서울시민회관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탱크 한 대가 시민회관 계단위에 올라가 경계를 펴고 있다. 시민회관은 그로부터 한달여 뒤 화재로 전소됐다. ‘e영상역사관’ 제공

1969년 클리프 리처드 방한 공연 열려

시민회관의 건립으로 한국에도 드디어 외국의 큰 공연단을 유치할 수 있을 만큼 번듯한 대형 공연장이 생겼다. 그 이전까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가장 호화로운 공연장은 시공관(일제시대에 명치좌, 현재 명동예술극장)뿐이었는데 1000석이 조금 넘는 규모였다. 시민회관의 좌석 수는 대극장만 무려 3004석이다. 현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2200석이고,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꽤 넓어 보이지만 객석 간격이 넉넉해 1500석을 겨우 넘는다. 현재 공연장들과 비교해 봐도 엄청나게 큰 공연장이었으니 시민회관의 건립은 충분히 감격스러워할 만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런 큰 공연이 일 년에 몇 개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암울해진다. 생각해 보라. 극장이 크면 대관료도 비싸다. 좌석 수로 보나 대관료로 보나 당시 우리 공연예술계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물론 대통령 취임식이나 국경일 기념행사 같은 정부행사와 외국 공연단의 내한공연은 늘 시민회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 연극 공연장으로는 지나치게 크니 대규모 교향악단이나 대형 음악극에 어울리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3000석 극장을 2~3일이나마 채울 공연이 일 년에 몇 개나 될 것인가.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예그린악단 같은 국공립 단체의 공연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시민회관은 애초의 목적과 달리, 많은 관객을 몰아올 수 있는 영화와 대중예술 공연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자면 외국 공연단의 내한공연도 태반이 대중예술이었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교향악단 같은 이른바 클래식 음악 단체도 꽤 있었지만, 냇 킹 콜, 팻 분, 빌리 본 악단, 브러더스 포 등이 모두 시민회관 무대에서 공연했다. 1992년 신세대 문화 시대의 개막을 알린 뉴키즈온더블록 내한공연에 비견되는, 청년문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1969년 10월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도 시민회관에서 이루어졌다.(흔히 언급되는 이화여대 대강당 공연은 하루로 예정된 시민회관 공연이 매진되면서 급하게 기획된 연장 공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나 한국 대중예술 공연에서도 시민회관이 거의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술영화만 고른다거나 대중예술 공연에서 특정한 양식을 배제하는 식의 선별 없이 그냥 다 대관해준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아시아영화제’ 같은 국제행사나 <유관순> 같은 ‘건전’한 영화만 들어온 게 아니라 <007 시리즈> 같은 액션영화나 일반적인 멜로드라마도 상영되었다. 대중음악에서도 좀 점잖아 보이는 경음악(대중음악계의 기악연주를 이렇게 불렀다), 1963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패티 김의 ‘패티 김의 바이바이쇼’, 미국에서 활동한 김시스터즈의 1970년 내한공연 같은 것만 들어온 게 아니다. 흘러간 트로트, 허벅지까지 드러낸 무용수의 라인댄스, 만담가의 우스갯소리와 배삼룡의 개다리춤까지 뒤섞인 쇼에도 아무 제한 없이 개방되었다. 그러니 시민회관 대극장은 그야말로 대중예술의 가장 뜨거운 공연장이었다고 할 만하다.

개관한 지 몇 달 뒤인 1962년 초의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자. 1월21일부터 서울가극단의 <쑈는 알고 있다>, 바로 뒤이어 1월25일부터는 가극단 모던스테이지의 <명동 스토리>, 2월5일부터는 당시 연예공연이나 다를 바 없는 ‘민속예술대축전’, 여기에 2월15일부터 제일소녀가극단 탄생기념 공연 <춤추는 자유세계>가 이어지는 식이다. 모두 노래, 춤, 코미디와 만담, 짤막한 대중적 음악극 등을 엮은 버라이어티쇼이며, 김정구 등의 선배급 가수부터 현인·백설희 등 1950년대 가수, 여기에 블루벨스 사중창단이나 이춘희 등 새롭게 등장한 스탠더드팝 가수, 이종철·구봉서·서영춘·배삼룡·양훈·양석천·백금녀·곽규석 등 쟁쟁한 신구 코미디언들이 출연하는 식의 공연이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이미자, 패티 김, 윤복희, 서영춘, 조영남, 남진, 나훈아 등의 리사이틀이 줄줄이 무대에 올랐다.

그러니 ‘시민회관을 폼 나게 지어놓고 저속한 대중 쇼나 영화만 올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이에 맞서 ‘고급한 공연으로는 채울 수가 없는데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연장을 그저 비워둘 수는 없다’는 현실적 반론이 나왔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뾰쪽한 수가 없었으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논의는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었다.

서울시민회관은 대중예술 공연뿐 아니라 각종 정치 행사도 열렸다. 1970년 9월29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의 깃발을 든 김대중(가운데), 김영삼(오른쪽), 이철승이 손을 맞잡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시민회관은 대중예술 공연뿐 아니라 각종 정치 행사도 열렸다. 1970년 9월29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의 깃발을 든 김대중(가운데), 김영삼(오른쪽), 이철승이 손을 맞잡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60년대 대중예술의 메카 구실
대중가수 콘서트에 문호 활짝
영화상·코미디언 공연도 소화
세종문화회관 된 뒤 ‘근엄’ 변신

‘짝퉁 비틀스’의 무대 된 경복궁

19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서도 정부의 행사나 클래식 음악 공연이 조금 많아졌고, 동아방송, 동양방송, 문화방송 등 급격히 수가 늘어난 방송사가 앞다투어 시민회관에서 행사와 쇼를 개최하는 것이 조금 다를 뿐 큰 변화가 없었다. 방송사는 연말의 10대가수쇼, 올스타쇼 등으로 시민회관을 채웠고, 아직 방송의 중심에 서지 못했으나 이제 막 솟아오르는 젊은이들의 취향도 시민회관에서 먼저 그 폭발력을 과시했다.

1966년 6월의 ‘보컬그룹 경연대회’에는 블루벨스나 이시스터즈, 정시스터즈 등 스탠더드팝 중창단뿐 아니라 차중락·차도균·윤항기 등으로 구성된 ‘한국의 비틀스’ 키보이스, 신중현이 이끈 애드훠 등의 록그룹도 대거 참여했다. 키보이스의 리드보컬 차중락이 고무장화를 신고 나와 엘비스 노래를 불렀다는 전설적인 무대가 이 대회로 추정된다. 1966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주최로 해마다 열린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의 장소도 시민회관이었고, 윤형주, 김세환, 강근식, 정성조 등이 대학생 시절에 모두 여기를 거쳐 갔다.

신중현이 키운 펄시스터즈와 김추자가 등장한 1968~69년에 이르면 새로운 흐름은 더욱 뜨거워졌다. 1969년 ‘아시아 그룹사운드 제전’에는 일본, 미국, 인도네시아 등 외국 록밴드가 시민회관 무대에 올랐고, 이해부터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해마다 열려 트윈폴리오 등의 포크그룹과, 키보이스(앞서 언급한 제1기 멤버가 아닌 ‘해변으로 가요’로 기억되는 제2기 키보이스), 히식스 등 쟁쟁한 록그룹이 무대에 올랐다. 특별출연한 신중현과 퀘션스는 사이키 조명을 갖고 나와 번쩍거렸고, 영화 <고고70>의 모델인 데블스는 해골이 그려진 의상을 입고 쇼걸을 눕힌 관을 끌고 무대에 올라 관객을 경악시켰다. 청년문화 바람으로 젊은이들의 취향 변화가 뚜렷해지자 해마다 이런 페스티벌은 그 수가 늘어났고, 상당수가 시민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앞서 이야기한 클리프 리처드 공연의 ‘광란의 밤’까지 생각하면 이 시대 시민회관은 대중예술이 격동하는 가장 뜨거운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부근에서 벌어진 ‘광란의 밤’은 비단 시민회관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1964년 비틀스의 카피밴드인 리버풀비틀스가 내한공연을 했는데, 관중의 태반이 진짜 비틀스가 온다고 착각하고 몰려들었다. 공연 장소는 놀랍게도 경복궁이었고 공연은 무려 5일 동안 이어졌다. 비틀스가 록음악의 본토인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 1964년이었음을 생각하면, 바로 그해에 ‘짝퉁’ 비틀스 공연이 성황리에 개최되고 ‘한국의 비틀스’를 표방한 키보이스와 ‘한국의 벤처스’라 할 만한 신중현의 애드훠가 나란히 첫 앨범을 발매했으니 참으로 놀랄 만하다. 이러한 흐름이 물밑에서 수면 위로 올라왔음을 증명하는 장소는 모두 시민회관과 광화문 부근이었다.

1962년의 서울 세종로의 모습. 사진 정면의 북악산 아래 지금은 철거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이 보이며, 왼편에는 바로 전해인 1961년 11월에 완공된 서울시민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민회관은 각종 공식 행사와 문화예술 공연의 무대였다. 서울시민회관 건너편에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 현재의 미 대사관)과 경제기획원 쌍둥이 빌딩이 보이며, 광화문 사거리 오른쪽 모서리에는 비각이 서 있다. <서울, 20세기-100년의 사진기록>
1962년의 서울 세종로의 모습. 사진 정면의 북악산 아래 지금은 철거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이 보이며, 왼편에는 바로 전해인 1961년 11월에 완공된 서울시민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민회관은 각종 공식 행사와 문화예술 공연의 무대였다. 서울시민회관 건너편에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 현재의 미 대사관)과 경제기획원 쌍둥이 빌딩이 보이며, 광화문 사거리 오른쪽 모서리에는 비각이 서 있다. <서울, 20세기-100년의 사진기록>

10월 유신 한달 뒤 화재로 전소

방송사가 주최하는 쇼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이미자, 배호부터 남진, 나훈아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가수와 코미디언들은 모두 시민회관 무대에서 최고의 환호를 받았다. 당시 연말의 10대가수쇼, 올스타쇼 등도 대개 녹화방송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연말마다 치열한 대관 쟁탈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나훈아 피습 사건이 벌어진 곳도 시민회관이었다. 한국연예단장협회 주최로 열린 올스타쇼에 출연한 나훈아가 ‘찻집의 고독’을 부르던 중 병을 깨어 들고 무대로 뛰어올라온 김아무개씨에게 얼굴을 찔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시민회관의 마지막도 대중문화와 함께였다. 1972년 11월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기념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이 끝나자마자 화재가 발생했고 그 큰 건물이 전소되었다. 사망자를 54명이나 낸 대형 참사였다. 197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대연각 화재 사건이 났었는데 꼭 1년 만에 그에 버금가는 화재 사고가 또 터진 것이다.

이로써 시민회관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중앙청 바로 앞 공공 공연장에서 정부 행사와 유명 교향악단과 대중가수의 올스타쇼가 같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던 시대도 완전히 끝이 났다. 아직 우리나라의 클래식 음악이나 무용의 양적 성장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건립된 시민회관은 의도하지 않게 대중예술의 전당이 되었고, 그 모던하고 간결한 외양만큼이나 ‘쿨하게’ 모든 대형 공연과 행사를 다 포용했다.

이후 이 자리에 서게 된 세종문화회관은 이름부터 거룩하게도 ‘세종’이었고 건물은 화려하고 장식적이었으며 신전처럼 돌기둥을 세워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드러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국 대중가요와 코미디언들은 이 무대를 디딜 수 없었다. 한국 대중가요는 대한극장·국도극장 등 영화관 무대를 전전하다 음향이 웅웅 울려대는 체육관에서 공연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민족’이니 ‘전통’이니 하는 말들을 종신집권의 명분으로 이용하게 된 바로 그 시점이었다.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날로부터 꼭 한달 반 만에 시민회관이 전소되다니, 참 우연치고는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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