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조동진 다시듣기] 시처럼, 가을처럼 젖어들다

등록 2017-08-29 17:09수정 2017-08-29 17:30

음악인생 30년 즈음인 2000년 조동진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같은 음악을 추구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조동진 음악의 독보적 좌표를 짐작하게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음악인생 30년 즈음인 2000년 조동진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같은 음악을 추구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조동진 음악의 독보적 좌표를 짐작하게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일부)

조동진(1947. 9. 3~2017. 8. 28). 한국 포크음악의 거장이 꼭 이맘때 떠났다. 바람이 서늘해지다가 이제 9월이 오면, 암 투병 중이던 그는 후배 뮤지션들과 13년 만의 무대에 오를 참이었다. 특유의 낮고 단단한 음성으로 노랫말에 깊이를 더하는 이 음악가가 무대에 서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들은 이제 그를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 시간을 맞았다.

1집 <조동진>(1979)을 시작으로 2집 <조동진2>(1980), 3집 <조동진3>(1985), 4집 <조동진4>(1990), 5집 <조동진5>(1996), 6집 <나무가 되어>(2016)를 세상에 남긴 조동진은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한길로 죽 가서 자신의 흐름을 만들고 음악적인 성찰을 이뤘다”(가수 이장희)는 평이 지배적이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조동진 음악의 특별함을 “어떤 종류의 전형적 문학적 서정이 두르는 신비주의나 상투적 휴머니즘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고 도취나 나르시즘 없음”으로 표현하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런 형태의 상이 있다면 수상자로 마음속에 조동진을 품고 있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시집을 내기도 했던 조동진 곡은 가사가 각별히 아름답다. ‘나뭇잎 사이’를 지칭하는 한국어 단어는 마땅치 않아도 70·80년대는 조동진을 통해 나뭇잎 사이라는 어떤 ‘작지만 확실한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을 얻은 셈이다. 날카로운 감각을 둥글려 표현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한국방송 유튜브 계정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땐/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제비꽃’ 1985)

그의 대표곡으로 ‘제비꽃’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가수 장필순, 이은미 등이 리메이크해 인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포크음악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하나인 장필순은 조동진의 음악적 직계로 불린다. 조동진이 80년대를 대표하는 레이블 ‘동아기획’을 이끌 때 장필순을 비롯해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김현식 등이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눈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 1979)

‘행복한 사람’은 조동진 음악의 ‘서시’ 격이다. 1집 1번 트랙에 수록된 곡으로 많은 이에게 조동진을 각인시킨 노래. 당시 어두웠던 시대 상황에 비춰 ‘언더그라운드’에선 저항성 깃든 대중음악이 한 부류를 이루는 와중에 다른 한켠에선 시대 때문에 시든 마음을 다독이는 음악이 조동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동진은 1966년 미8군 밴드로 음악을 시작해 록그룹 ‘더 쉐그린’ ‘동방의 빛’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포크로 건너간 조동진의 음악은 ‘서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음악적 일탈로 대중을 놀라게 하는 대신 익숙한 감동을 더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처럼 대중과 함께했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어둠은 벌써 밀려왔나/ 거리엔 어느새 정다운 불빛

그 빛은 언제나 눈앞에 있는데/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나뭇잎 사이로’ 1980)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소낙비 내리던 그 한낮의 어둠 속에서/ 우리 말하던 사랑과 자유 이제 아무 의미 없어도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에 잠깐씩 들렸던 바다/ 그 파도 소리 그 저녁 노을 우리 함께 기억하리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친구들에게’ 1996)

동아기획의 시절을 지나 1992년께 조동진과 그의 동생인 조동익을 주축으로 ‘음악 친구들’이 모여 세운 ‘하나음악’은 전설의 음악공동체였다. 단순한 음반사를 넘어 구성원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며 음악을 했다.

“이런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싶어 겁없이 만들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우리가 좋아하면 남들도 좋아하겠거니 했죠.” 골수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던 하나음악은 90년대 중후반 들어 가요계가 거대 기획사 위주로 급격히 쏠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나음악은 2003년 문을 닫았다. “막판에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다들 3년 동안 무보수로 일했어요. 내가 미안해서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관련기사 : [인터뷰] 신곡 ‘강의 노래’로 돌아온 조동진)

유리잔에 넘치는 불빛처럼/ 우리 빛나는 금빛 환상처럼/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거리마다 춤추는 유혹처럼/ 우리 숨가쁜 오늘 하루처럼/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그곳이 나의 천국/ 눈먼 행복과 벗겨진 꿈/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 없는 열기만 가슴에 있네

거리마다 춤추는 유혹처럼/ 우리 숨가쁜 오늘 하루처럼/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눈부신 세상’ 1996)

“발걸음 멈추게 하던 너의 순간들, 서둘러 사라져버린 너의 그림자”

밤새 불어난 강물/ 물에 잠겨버린 너의 날들

밤새 달려온 강물/ 물에 쓸려가는 너의 아픔

불어오는 바람의 위로/ 물에 비친 구름 빈 하늘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 저 산 그림자

이름, 이름 모를 숲/ 저문 들판을 지나

우리 떠나왔던 곳/ 다시 돌아서 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여행

밤새 들려온 강물/ 물에 흘려보낸 너의 노래

고여드는 마음의 강물/ 우리 이제 다시 흐르니

돌아오는 새들의 행렬/ 저 먼 종소리 (‘강의 노래’ 2015)

하나음악은 2011년 ‘푸른곰팡이’로 돌아왔다. 음악적 동지 윤영배·조동희·고찬용·장필순·이규호 등이 잇따라 푸른곰팡이에서 새 음반을 냈다. 조동익도 2013년 장필순 7집 프로듀서로 참여하면서 합류했다. 2015년 3월, 14년 만에 신곡 ‘강의 노래’를 들고 돌아온 조동진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강은 여러 의미로 해석하고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소재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앨범 주제로 생각해왔다”고 했다. “하나음악 식구들이 예전부터 강가로 자주 야유회를 갔거든요. 족구도 하고 닭백숙도 먹고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도 일조한 것 같아요.”(조동진의 막내 동생인 싱어송라이터 조동희)

조동진은 싱어송라이터 집안의 맏이다. 형과 함께 한국 포크음악계를 이끌었고 제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조동익, 2011년 1집을 낸 뒤 싱어송라이터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동희(푸른곰팡이 대표)가 삼남매다.

뒤돌아보면 먼 저녁 바다/ 발걸음 멈추게 하던 너의 순간들

귀 기울이면 빈 바람소리/ 서둘러 사라져버린 너의 그림자

채우고 또 채우려 했었던 아쉬움을/ 비우고 또 비우려 했었던 그 기나긴 슬픔의 시간

눈 감아보면 흰 구름언덕/ 지금은 어느 또 누가 돌아보는지

채우고 또 채우려 했었던 아쉬움을/ 비우고 또 비우려 했었던 그 기나긴 슬픔의 시간

(‘저녁 바다’ 2017, 노래 장필순)

지난 5일 발매된 장필순 <소길9화> 앨범에 들어 있는 ‘저녁 바다’ 가사가 조동진의 것이다. 생의 ‘저녁’을 맞아 꺼져가는 빛을 붙든 음유시인은 길지 않은 분량에 바다, 발걸음, 순간, 바람소리, 그림자, 아쉬움, 구름, 시간 같은 단어를 골랐다.

조동진은 지난해 11월 20년 만에 6집 <나무가 되어>를 내놓았다. “시간을 넘어 강을 흘러 나무가 되어”(음악평론가 신현준) 돌아온 그는 “그렇게 빨리,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을 줄 몰랐다. 기타를 집어넣는 데 10년 다시 꺼내는 데 10년 걸린 셈”이라고 간단히 소회를 밝혔다. (▶ 관련기사 : 조동진, 시간을 넘어 강을 흘러 나무가 되다)

조동진은 성악가이자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조긍하(1919~1982)의 아들이다. 그가 딱 한번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참여한 영화 <산책>(감독 이정국, 2000) 삽입곡에도 ‘나무’라는 곡이 있다.

“아쉬워 말아요,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서러워 말아요 꽃잎이 지는 것을/ 그 향기 하늘 아래 끝없이 흐를 텐데/ 그 향기 하늘 아래 끝없이 흐를텐데

아쉬워 말아요 지나간 바람을/ 밀려오는 저 바람은 모두가 하나인데/ 밀려오는 저 바람은 모두가 하나인데

부르지 말아요 마지막 노래를/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다시 부르는 노래’(‘마지막 노래’) 1986)

“아주 상식적인 말이기도 하고요. 또 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런 이야기지만 좋은 노래, 혹은 좋은 소리란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좋지 못한 일들이 남들에게 아주 쉽게 전이되듯이, 좋은 마음이란 마치 꽃의 향기 같아서 넓게 넓게 퍼져가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노래에 귀 기울이는 분들께 그러한 분위기를 함께 나누고자 할 때 이보다 더한 축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조동진이 1992년 <에스비에스>(SBS)에 출연해 밝힌 음악관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