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낭독회 일꾼 김태선 평론가.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작가로서 내가 어떻게 변할지 혹은 변하지 않을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세월호 이전의 그 작가와 똑같지 않다.” 소설가 은희경씨가 지난 5월27일 청중 앞에서 읽은 자신의 산문 ‘기억의 한 방법/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는가’의 일부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지난해 7월30일 낭독한 글에서 세월호 참사는 자신의 후반부 삶의 ‘생애의 사건’이 되었다면서 이를 남은 삶의 쓰디쓴 양식으로 삼겠다고 했다.
2014년 9월부터 매달 마지막 토요일 10여명의 작가·시민이 모여 자신 혹은 남이 쓴 글을 읽는 행사를 열고 있다.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한 ‘304 낭독회’다. 지난달 36회를 채웠고 304회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낭독회 ‘일꾼’ 김태선(35) 문학평론가를 지난 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기억의 단단한 힘’이란 이름으로 지난 3월25일 월드컬처오픈 W스테이지 안국에서 열린 31번째 304 낭독회 모습.
참사 뒤 5개월이 흘러 광화문광장에서 첫 낭독회가 열렸다. 작가 40여명이 발의했다. 이들은 세월호는 명백히 ‘사람의 말’로 기록되고, ‘사람의 말’로 내내 얘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왜곡하고 상처 입히는 괴물 같은 말들이 세월호를 지우려고 혈안이 되는 모습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낭독회를 시작하는 일꾼으로 양경언·김태선 평론가와 김현 시인, 최정화 소설가가 추천됐다. 양경언 평론가는 지난해까지 사회를 전담했다. 올해부턴 양·김 두 평론가가 격월로 사회를 보고 있다.
“낭독자의 70~80%는 작가이고 나머지는 시민들입니다. 낭독회 일꾼은 현재 15~20명 정도죠. 일꾼들이 주변에서 문인이나 일반인을 섭외합니다. 에스엔에스(SNS)로 지원을 받기도 해요.” 지원자가 탈락하는 경우는? “그렇지는 않아요. 바로는 아니더라도 한두달 기다려 다 낭독합니다.” 매달 두 명의 일꾼이 당번을 맡아 낭독회를 준비한다. 문제가 있어 거절된 원고는 한번도 없었단다. “재작년 6월 낭독회 때 이우성 시인의 글에 욕설이 담겨 과격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대로 했어요. 그 정도면 괜찮다는 의견이 많았죠.” 낭독회 원고는 소책자로 발간되며, 인터넷(304recital.tumblr.com)에서 볼 수 있다.
‘세월호 사람의 말로 얘기하자’
3년 전 9월부터 매달 한차례씩
젊은 작가 15~20명 ‘일꾼’ 참여
“‘세계 나 홀로 사는 곳 아니다’
작가들 세월호 이후 인식 변화
이영광 시인 낭독 가장 인상적”
은희경, 김명인씨를 포함해 여러 낭독자들은 세월호 참사가 자신의 삶과 문학에 미친 영향을 진술하는 데 글의 초점을 맞췄다. 윤경희 평론가는 세번째 낭독회에서 반복적으로 안산을 찾았다는 얘기를 하며 자신이 4월16일 이후 잔해를 배회하는 사람이 되었다고도 했다.
“작가들이 세월호를 통해 이 세계가 나 홀로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세월호 이전의 문학이 나를 중심으로 쓰였다면 세월호 이후는 타인과 타자를 발견하고, 거기서 구축된 세계를 중심으로 쓰여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죠.”
광주민주화운동을 끌어와 이렇게 설명했다. “5·18은 학생운동을 촉발시켰죠. 문학적 언술보다는 시위와 같은 행동이 중요했어요. 세월호에선 말이 중요해요. ‘사람의 말’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에 공동의 것을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지요.”
지난해 9월24일 하자센터에서 열린 25번째 낭독회.
그는 낭독회에 32번 참석했다. 하지만 직접 낭독하지는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죠.” 낭독을 권유받은 작가가 주저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성향 차이죠.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글을 낭독하다 보면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받거든요.”
304회를 채우려면 22년이 더 남았다. “304회를 하자는 결의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암묵적으로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 거죠. 낭독회가 희생자들이 참사를 겪지 않았으면 살았을 최소한의 시간만큼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난 3년 한 달도 빠뜨리지 않고 낭독회를 열었다. 위기는 없었을까. “없었어요. 굳이 꼽자면 지난해 문단 성폭력 사건이죠. 문인에 대한 혐오정서가 퍼져 작가들의 집필 의욕이 꺾였고, 낭독회 일꾼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다소간의 시각차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일꾼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신진 문인들이다. “젊은층이라 진보 성향이 많은 편입니다. 작가회의에 속한 이들도 많지만 저는 아닙니다. 어디에 소속되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는 2011년 소설가 황정은 작품론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분에 당선됐다.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소설가 김수영론으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29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6번째 낭독회.
“제 글쓰기는 타인에게서 받는 영감이나 그들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편입니다. 대학 때 시를 접고 평론을 한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데 능숙한 편이라며 “평론은 일종의 대화 같았어요”라고 했다.
낭독회는 ‘뜻밖의 발견’을 주기도 한단다. “낭독자들은 세월호만 이야기하지 않아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유가족의 슬픔에 깊이 공감한다는 건 스스로 좋은 삶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낭독회에서) 그런 개인의 모습을 봅니다.”
책읽기와 낭독 체험의 차이는? “이영광 시인이 낭독할 때 (낭독자나 저 자신이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아니게 되는 그런 체험이죠. 낭독은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낭독자의 발화나 어조도 중요해요. 연극 경험이 있는 장수진 시인의 낭독은 초혼의식 같았어요.”
임승유·백은선·안미린 시인을 좋아한다고 했다. “여성으로 살면서 겪은 아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시대나 사회의 문제를 놓치지 않아요. 아픔을 명료한 언어가 아니라 감각의 언어로 표현하죠. 느낌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니 모두 공감할 수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