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맨 왼쪽)이 27일 저녁 서울 강남구의 한 영화관에서 열린 영화 <남한산성> 시사회 뒤 황동혁 감독(가운데)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어린 나루가 연을 날리러 가는데 서날쇠가 ‘멀리 가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말인데,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에요. 김상헌과 최명길의 치열한, 목숨을 건 거대담론에 비하면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훨씬 위대한 문장입니다. 이 간단한 문장 안에 인간의 미래와 삶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제 소설 제목을 ‘남한산성’이 아니라 ‘멀리 가지 마라’로 하고 싶을 정도예요.”
소설가 김훈이 자신의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 <남한산성>에 대해 “내가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영상으로 잘 표현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김훈은 27일 저녁 서울 강남구의 한 영화관에서 영화 <남한산성> 시사회가 끝난 뒤 황동혁 감독과 함께 마련한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참여해 이렇게 밝혔다. 그는 “내가 쓴 소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과 거기에 저항하고 신음하면서, 짓밟히면서도 앞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고난과 슬픔을 묘사하려는 것이었다”며 “영화는 어쨌든 감독의 것이지만, 그런 내 의도를 영화가 잘 살린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훈은 “뜨겁고 격정적인 것을 냉엄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영화에서 느꼈다”며 “영화 첫 장면에서 김상헌이 사공을 죽일 때, 카메라가 멀리 빠지면서 얼어붙은 산과 강을 보여줌으로써 그 죽음과 죽임이 조국의 산하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 한가지 예”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황동혁 감독은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바로 김상헌이 사공을 베는 장면이었다”며 “사공의 놀란 얼굴과 김상헌의 행동을 구체적인 숏으로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 장면은 어쩐지 아주 멀리서 바라보고 싶다 또는 멀리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렇게 처리했다”고 화답했다. 황 감독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뜨겁게 논쟁을 펼치는 소설 속 대사가 처절하고 치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고, 얼음과 눈이 뒤덮인 혹한의 겨울 남한산성을 묘사한 문장의 비애미와 비장미 역시 영상으로 옮기고 싶었다”고 영화를 만든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멀리 가지 마라’라는 대사도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것을 촬영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포함시킨 것”이라고 소개했다.
김훈은 “작가인 내가 작품 뒤에 감추어 둔 메시지를 감독이 끄집어 내 언어화하는 것을 보고 ‘들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김상헌과 최명길이 화해하는 장면과 김상헌의 자살 시도 장면을 예로 들었다. 황 감독은 “사료에는 김상헌이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적으로는 첫 장면에서 그가 사공을 베었던 칼로 자결하게 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고 받았다.
김훈은 “영화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을 가리켜 ‘두 충신’이라고 했던데, 이것 역시 내가 감춰 놓았던 걸 들킨 또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두 사람은 꼭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하나의 비극적 사태가 포함하는 양면일 뿐”이라며 “당시로부터 400년 지난 지금 돌아볼 때는 둘 다 충신이고, 인조가 항복하더라도 상헌 같은 신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한 패배가 아니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훈은 “인조 임금은 위대한 임금은 아니었고,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다”며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로 가는 길이 그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항복하기 위해) 겨울의 얼어붙은 산길을 내려갈 때 저 불쌍한 임금이 비로소 만 백성의 아버지가 되는구나, 처음으로 애비 노릇을 하는구나 싶어 소설을 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소설에서 느낀 인조는 지도자라기보다는 나약한 인간이었다”며 “그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고 받았다. 그는 “예민하고 쇠약하며 불안한 인조를 표현하는 데에는 박해일이 적임이라고 생각해서 캐스팅에 가장 공을 많이 들였다”고 소개했다.
황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사드와 북핵 문제 등이 벌어지면서 영화 속 상황과 지금 우리의 상황이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며 “일단 영화는 재미로 먼저 존재해야 하지만, 그와 함께 380년 전 위정자들과 민초들이 겪었던 일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고민하고 이야기할지 질문을 던져 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훈은 “이 영화와 소설은 패배와 치욕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그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조금씩 조금씩 돋아나고 있는 희망과 미래의 싹, 보일 듯 말 듯한 싹을 보아 주시길 부탁 드린다”는 말로 행사를 끝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