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자신의 행위로 사적 가치나 공적 가치를 추구한다. 예술로 천착되는 사적 이슈와 공적 이슈 사이에는 사회의 수용 여건이나 정도에 따라 심연이 자리한다. 그 이유는 이념과 지향성의 차이 때문이다. 그것이 심화될 경우 진영논리의 다툼으로 번지거나 상호 간의 투쟁으로 비화하기까지 한다. 그처럼 예술행위가 사적 의지에서 비롯되든지 혹은 사회적 이슈와 문화적 담론에서 출발하든지 각기의 특이성이 보편성을 획득해야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사적 차원의 예술행위라도 그 성과에 준하는 사회적 평가와 공적 수용 과정을 필히 거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예술의 사회화와 공적 가치의 구현 문제는 작가에게 중요한 사안이다. 이는 필자도 마찬가지로서 사진을 가까이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위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에게 영감과 귀감을 선사한 외국 작가 3인의 작품집을 소개하려 한다. 그들은 20세기의 인류와 사회가 맞닥뜨린 현실의 모순과 고단한 역경을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들에게서 사진은 작업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며, 자신의 사진 외에도 보도사진을 적극 활용한다. 각자의 성향과 색깔에 차이가 있으나, 기존 형식을 탈피하여 사진의 물성을 과감하게 벗겨내거나 사진과 언어·디자인·건축적 요소 등을 다양하게 아울렀다. 그들이 돋보이는 것은 작업에 지역성, 장소성, 현장성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공공성의 구현을 예술의 모토로 삼았다는 점이다.
크시슈토프 보디치코는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성공한 작가로서 이미지 프로젝션의 원조 격이다. 그의 이슈는 사회·정치·경제·역사·문화와 삶·계급·이념의 영역을 두루 포괄한다. 한반도의 현재 상황이 겹쳐지는 반전·반핵을 주제로 한 프로젝션 작품들은 인상 깊다. 미국과 각국 도시를 돌면서 지역의 이슈를 반영한 이미지 투사 작업을 펼쳤다. 그가 작업의 장소로 즐겨 선택한 곳은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 기념탑, 빌딩, 교회 등의 공공장소나 건축물이다. 그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것은 현장에서 프로젝터 전원을 끄면 투사 이미지가 즉시 사라지고, 이후 작품의 개념과 그 증거로서의 사진 자료만 남게 된다는 점이다. 즉, 그는 <퍼블릭 어드레스>(Public Address·1993)라는 작품집 제목 그대로 공공연설을 한 것이다.
데니스 애덤스는 사진·언어·디자인·건축적 요소를 정갈하게 엮어낸 공공미술 성향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 작가다. 지역사회의 서사와 맥락을 기반으로 정치·역사·경제·이념적 이슈들을 설치로 깔끔하게 풀어낸다. 미국 사회의 인종적, 계급적 현실과 냉전시대의 사회·정치·역사적 모순을 드러낸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그도 작업에 장소성, 현장성, 공공성의 도입을 빼놓지 않는다. 전시장 외에 거리, 계단, 정류장, 표지판, 빌보드, 로비, 윈도 등을 작업의 장소로 활용한다. ‘아키텍처 오브 앰니지아’(The Architecture of Amnesia·1990)라는 작품집 부제가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들은 상실된 기억들을 강하게 환생시킨다.
올해 얼마 전 알프레도 자는 칠레의 대표적인 민중작가이자 세계적인 대가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미 그는 199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작가이며, 예술·건축·영화를 두루 아우른다.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이념적 모순과 그 실상을 들춰내고, 노동·인종·이주·난민 등의 실상과 문제를 비평적 시각과 인류학적 시각으로 풀어낸다. 사진·언어·디자인·건축·오브제·물질재료 등을 버무리는 재능과 감각이 뛰어나다. 거울 같은 반영체와 액체류의 반영물질을 맛깔스럽게 활용하는 디스플레이 감각도 비범하다. <잇 이즈 디피컬트>(It is difficult·1998)라는 작품집 제목이 이채롭다. 그의 말처럼 정말 인간사가 간단치 않다. 그리고 거기에 모순과 역설이 지독하게 배어 있다.
이강우(작가·서울예술대학교 사진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