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향원정 북쪽의 취향교 유적 발굴 현장. 뒤쪽 향원정을 배경으로 연못 바닥을 파서 돌덩이들을 넣고 다져 쌓은 취향교의 교각 기단부(돌적심)가 여러개 보인다. 적심 옆에 열을 지어 세운 나무기둥은 일제가 후대 원래 취향교를 헐고 폭이 축소된 간이다리를 세울 때 쓴 것들이다. 향원정 뒤로 한국전쟁 뒤 남쪽 방향으로 거꾸로 놓여진 지금 취향교 모습이 보인다. 역사의 풍상을 겪은 취향교의 수난사 흔적들이다.
서울 경복궁 후원의 향원정(국가보물)과 이 정자를 둘러싼 연못은 서울시민들의 나들이 명소로 유명하다. 이곳은 지난 5월부터 들어갈 수 없게 됐다. 문화재청이 낡은 향원정과 부근 연못을 폐쇄하고 보수공사 및 발굴조사를 벌이는 중이다. 최근 이 연못 바닥에서 연못 북쪽에 걸쳤던 옛 다리 ‘취향교’의 원래 다릿발(교각)을 받치는 돌기단부(적심)가 발견돼 눈길을 끈다. 원래 향원정 북쪽에 놓였던 다리의 원래 자리가 재확인된 것이다. 일제가 원래 다리를 허물고 나무기둥을 새로 놓아 간이다리로 변형·축소시킨 흔적도 함께 드러났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향원정 북쪽의 연못 바닥을 발굴조사한 결과, 취향교의 원래 교각들을 놓았던 기초부분의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조사자료와 사진을 보면, 바닥에서 19세기말 취향교를 놓을 당시 교각 기단 용도로 파넣은 돌적심(기둥을 튼튼하게 받치려고 지반을 파고 채워넣은 자갈 다짐)이 모두 8개 확인된다. 다리를 측면에서 볼 경우 모두 4줄의 다릿발이 서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향원정 북쪽 원래 취향교터 조사현장의 세부 모습.
이번 조사에서는 적심과 별개로 그 옆에 일제강점기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기둥 41개가 바닥펄에 꽂힌 채로 드러났다. 이는 일제가 적심 위에 놓은 원래 취향교를 헐고 나무기둥을 꽂아 새로 간이다리를 만든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1915~35년 일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와 당시 유리건판 사진에는, 원래의 취향교로 추정되는 다리와 일제가 향원정 북쪽에 새로 설치한 일본풍 간이다리의 서로 다른 모습이 실려 발굴결과를 뒷받침하고 있다.
발굴단은 이와 함께 원래 취향교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는 보도시설과 건청궁에서 연못으로 내려오는 도랑인 암거(暗渠)의 흔적들도 찾아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발길이 닿았을 시설들이다. 연구소 쪽은 “조사결과 19세기말 고종 때 만들어진 최초의 취향교는 4열의 돌 적심 위에 놓인 교각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원래 적심을 버려두고 그 둘레에 나무기둥을 꽂은 새 간이다리로 축소, 변형시키면서 난간 모양이 바뀐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권10에 실린 경복궁 취향교의 모습. 지금과 달리 향원정 북쪽으로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에 나온 취향교의 모습. <조선고적도보>와 달리 곡선 난간에 다리기둥도 높아진 일본풍 정원 다리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원래 다리가 변형됐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일제강점기 ‘경복궁 향원정’ 제목을 단 엽서사진에 나온 취향교. 다릿발 구조는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비슷하지만, 난간을 붙인 점이 다르다. 이 세 사진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다리 외형이 상당히 변형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향에 취한다’는 뜻을 지닌 취향교는 ‘향이 널리 퍼지는 정자’란 뜻의 향원정과 짝을 이루는 다리다. 고종이 1860~70년대 경복궁 중건시기 향원정을 세울 때 같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거처였던 건청궁에서 남쪽의 향원정 연못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놓여져 있어, 학계는 고종이 아꼈던 산책길로 추정하고 있다.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의 사료인 <경복궁 배치도>와 <북궐도형>에도 본래 향원정 북쪽에 다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한국전쟁 때 부서진 뒤 1953년 정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재건됐다. 최근 문화재계에서 일제강점기 사진 등을 근거로 다리를 제 자리에 돌려놓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문화재청이 올해 5월 향원정 보수공사를 시작하면서 원위치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 들어간 바 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