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에 전시장 꾸미자’는 정부 제안
근사한 리모델링보다 소록도 삶 관심
“도착해보니 거기엔 마을이 있더라”
가난과 절망을 견딘 ‘보통의 삶’ 기록
“집이 없으면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
8월엔 ‘서생리 복원 준공식’ 열려
근사한 리모델링보다 소록도 삶 관심
“도착해보니 거기엔 마을이 있더라”
가난과 절망을 견딘 ‘보통의 삶’ 기록
“집이 없으면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
8월엔 ‘서생리 복원 준공식’ 열려
[토요판] 뉴스분석 왜?
소록도를 생각하다
▶ 11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리는 ‘건축의 소멸-보안여관에서 소록도를 생각한다’는 건축을 통한 기억-재생의 방법론을 고민하는 자리다. 건축가 조성룡이 지난 5년 동안 소록도를 드나들며 관찰하고 기록하고 일부 건물과 마을을 복원한 작업이 선보인다. <의재미술관> <선유도공원>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등의 작품들로 명성을 쌓아온 70대의 건축가를 소록도로 잡아끈 건 무엇이었을까.
5년 전이었다. 건축가 조성룡(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조성룡도시건축 대표)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소록도(전남 고흥군 도양읍)의 한 폐교를 전시장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한하운의 <보리피리>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같은 텍스트를 통해 어렴풋이 한센인들의 삶을 짐작하고 있었던 그에게 소록도는 놀라움이었다. “소록도에는 병원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해 보니 거기엔 마을이 있었다.”
전남 고흥군에 속하는 소록도는 여의도(2.9㎢)보다 조금 더 큰 면적(3.74㎢)에 아기자기 오목조목 꼬불꼬불 펼쳐진 14㎞의 해안을 품고 있다. 해안선 묘사에 이처럼 세 가지 부사가 붙어도 손색이 없는 까닭은, 이 섬이 육지와 격리됐던 시간은 대부분의 바닷가가 각종 개발과 간척사업으로 자연 그대로의 실루엣을 잃어버린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은 소록도의 바다는 빛나는 비늘을 지닌 살찐 물고기처럼 가만가만 뒤채었고, 해송의 향기는 은은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 허물어져 가는 마을이 있었다. 환자들이 살던 병사(病舍)의 집합이었다.
매월 한두번씩 5시간 소록도 여행길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소록도의 초등학교를 갤러리로 바꾸는 처음의 계획은 중간에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조성룡은 건물을 근사하게 바꾸는 리모델링 작업보다도 소록도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알고 싶었다. 그들의 마을을 기록하고 싶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그는 매월 한두번씩 서울에서 5시간 넘게 걸리는 소록도 여행길에 올랐다. 섬에 갈 때마다 가능한 한 동료 건축가, 디자이너, 출판인, 문인, 학자, 기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동행하려고 애썼다. 소록도의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 함께 지혜를 모으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조성룡은 성균건축도시설계원의 연구원들과 함께 소록도 마을과 관련한 자료를 찾고 실측을 하고 도면을 그렸다.
1916년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병원(자혜의원)이 이곳에 지어지면서 소록도는 한센인 수용소로 변했다. 치료보다는 격리가 우선이었다. 정해진 규율을 어길 경우엔 병원 감금실에 가뒀다. 범죄를 저질러 형무소에 갇힌 이들 중 한센인으로 의심되는 이들은 모두 광주형무소 소록지소에 몰아넣었다. 일제는 한센인들에게도 일본식 생활 양식을 강요했다. 일본식 옷을 입혔고, 신사를 지어놓고 참배하도록 했다. 현재 소록도엔 일제 때에 지어진 병원·형무소·창고·학교·신사 등 건물 13개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처럼 번듯한 공공건물들은 한센인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본래 소록도엔 10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 중 장안리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지금은 나머지 9개 마을 중 7개 마을에 한센인 500여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70살이 넘기 때문에, 정부는 앞으로 30년 뒤엔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소록도에 도착한 조성룡이 맨 먼저 포착한 것은 한센인들이 살던 집이었다. 소록도병원과 한센병박물관·중앙공원 일대를 돌아보려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진 장안리 주차장 한가운데엔 방 네 칸을 갖춘 지붕이 거의 없는 집 한 채가 남아 있었다. 왜 이 집만 홀로 남았는지 곡절은 알 수 없지만, 조성룡은 그 집을 살펴보면서 한센인들의 일상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가로세로가 3m×3m가 채 안 되는 방이 4개 있고 방마다 부엌과 앞마루가 딸려 있었다. 일종의 연립주택 꼴을 갖추고 있었으나, 3평도 안 되는 방 한 칸에서 5명씩 생활했다고 하니 직접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 뿐이지 감옥에 가까웠다. 조성룡은 “일본의 서민주택 양식인 나가야(長屋)와 닮은 구석이 많다”며 “굴뚝이 부엌 반대편인 집 앞편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애초엔 일본식으로 다다미 바닥을 깔았다가 나중에 온돌을 놓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소록도 병원 개소 초창기엔 한센인들에게 일본식 생활습관을 이식하려고 했으나 결국엔 한국식으로 절충점을 찾았으리라는 짐작이다. 조성룡은 장안리에 남은 이 집을 ‘100주년 기념 시설물’로 개조했다. 방 네 칸 중 2개는 그대로 남기고, 방 하나는 나무 소재로 내부를 둘러싸고 작은 갤러리를 만들었다. 나머지 방 한 칸은 지붕을 덮지 않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병원의 감금실 같은 극적인 학대의 공간도 인권유린의 본보기가 될 수 있지만, 이처럼 비좁은 방에서 가난과 절망을 견딘 한센인들 ‘보통의 삶’을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주차장에서 쉴 곳이 필요했던 관광객들은 잠깐 실내 내부를 기웃거리다가 툇마루에 앉아 숨을 돌린다.
소록도에서 가장 처음 생겨난 서생리 마을도 조성룡의 발길을 잡아당겼다. 이젠 아무도 살지 않는 서생리의 집들은 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1920~197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은 만지면 바스러질 듯했다. 하지만 그는 “허물어져내린 시멘트 기와 하나, 벽돌 한 조각도 쉽게 치워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건축 폐기물에 불과했을 것들이지만, 서생리에선 벽돌 조각 하나에도 서러움이 응축돼 있었다. 손가락이 다 떨어져나가 숟가락조차 제대로 쥘 수 없었던 한센인들이 직접 틀에 찍어 만든 벽돌, 기와였다. 조성룡은 서생리 작업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마을에 남아 있는 건축 재료를 최대한 재활용하고, 인공적 재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건물의 색깔과 느낌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로 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집 8채를 골라 마치 목발을 짚게 하듯 철제 비계로 무너져가는 건물을 괴었다. 비가 들이쳐 벽이 주저앉지 않도록 최대한 간소한 지붕을 얹었다. “너무나 최소한의 작업이라 차마 복원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일단은 붕괴를 막자는 것이었다.” 서생리에선 건축가의 사적인 욕망 대신 형태의 소멸을 유예하려는 섬세함과 신중함이 담겨 있다. 새로운 것을 쉽게 덧대지 않음으로써 기억은 ‘건축’된다. 서생리 프로젝트에 대해 디자인 비평가 김민수 교수(서울대)는 이렇게 비평했다. “나는 이번 서생리 마을 보존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영혼의 시술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생의 중력을 견딜 수 없어 오래전에 주저앉아 파묻힌 한센인들의 집과 여한을 다시 중력을 거슬러 들어올리고, 소록도의 역사적 기억과 삶의 상흔을 톺아보는 ‘치유의 건축’인 것이다.” 조성룡 선생은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다. “우리는 집이 없어도, 건축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우리는 건축이 없어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이 없으면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
“여기는 축사가 있던 곳이고…”
6개월간의 공사를 마치고 지난 8월31일 열린 ‘서생리 복원 준공식’엔, 예전에 이 마을에서 살았던 주민들도 참석했다. 이날 행사를 기록한 영상물을 보면, 처참한 질병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한 노인은 마을을 돌아보면서 “여기는 축사가 있던 곳이고, 저기는 사무실이었지. 여기 연탄을 모아뒀었어”라며 감회에 젖는다. 너무나 힘든 시절은 돌아다보기도 고통스러울 터인데, 세월이 지나 그에겐 추억의 한자락으로 남았다. 나비넥타이를 맨 할아버지 듀오의 하모니카 연주가 흐르고, 뒤이어 소록도병원의 직원인 이정현씨가 이날 준공식을 위해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 ‘소록도의 기억’을 불렀다. 영상물에서 그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지다 반짝이는 바닷물과 합체한다. “백년 전 이곳/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맨손으로 삶을 시작했어요/ 세월이 지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허물어진 터만 남아 있네요/ 오늘 우리의 작은 손길로 그들을 기억합시다/ 먼 훗날 지나가는 사람들 바람 부는 이곳에서 듣게 되리라/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피워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우리의 작은 손길로 그들을 기억합시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소록도를 생각하는 모임’ 주최로 11일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리는 ‘건축의 소멸 - 보안여관에서 소록도를 생각한다’ 전시를 기획하고 주관한 조성룡 건축가(오른쪽), 수류산방의 심세중 실장(가운데), 박상일 방장이 10일 낮 보안여관 전시장에서 작품을 설치하던 중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조성룡 건축가와 성균건축도시설계원이 소록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린 서생리 마을 도면 스케치.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소록도의 옛 마을 장안리에 설치된 소록도 100주년 기념 시설 앞에서 관람객들이 쉬고 있다. 사진작가 김재경
드론(무인비행장치)으로 찍은 소록도 서생리 마을 일대. 서생리는 소록도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마을이었다. 사진작가 김재경
소록도 서생리에 남아 있는 한센인들의 주거공간.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손상이 심하다.
건축가 조성룡은 소록도 서생리에 남아 있는 건물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비계를 설치하고 지붕을 덧대었다. 도시건축집단 성북동 이정환 제공
소록도 서생리의 폐가. 지붕이 내려앉고 있다.
건축가 조성룡은 소록도 서생리 마을의 폐가를 정비하고 집 주변을 정돈하는 등 건물에 ‘최소치’의 손질을 더했다. 도시건축집단 성북동 이정환 제공
보안여관에서 소록도를 생각하다
1930년대 동인지 <시인부락> 산실
2007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
이웃 ‘수류산방’ 등 함께 나서
11일부터 조성룡의 복원작업 전시
전시의 이름이 ‘보안여관에서 소록도를 생각한다’인 까닭은 이러하다.
경복궁 서편에 자리잡고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은 80여년 동안 사람들을 품어주는 여관의 역할을 다한 뒤 물리적 외양을 크게 바꾸지 않은 채 2007년부터 복합문화공간으로 쓰여왔다. 비록 건물은 낡았지만, 이곳은 1930년대 서정주 시인이 김달진·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역사적 공간이다. 사대문 안을 배회하던 많은 이들의 꿈과 한이 서려 있는 장소를 차마 해체할 수 없었던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일백문화재단 이사장)는 이곳을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로 활용해오다 올해엔 신관을 지어 전시실을 확장했다.
경복궁 동편, 종로구 팔판동에 자리잡은 출판사 수류산방의 박상일 방장과 심세중 실장은 이웃에 설계사무소를 둔 건축가 조성룡과 2001년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서도 5년 동안 끊임없이 소록도를 오가는 조성룡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혹시 개발 바람이 불어 소록도의 100년간 상처가 자본의 값싼 위로로 덧날까도 걱정스러웠다. 이들은 좀더 많은 사람들이 소록도에 대해 알고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으로 수류산방은 기억을 성공적으로 재생시킨 모범사례라 할 수 있는 보안여관에서 조성룡의 작업을 소개하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보안여관 앞면을 펼침막으로 가린 뒤 천에 창 모양을 오려내고 그 안에 소록도 풍경 사진을 넣는다. 보안여관의 객실 10여개엔 소록도를 촬영한 사진가 김재경·진효숙·이지응·이명섭의 작품과 화가 이진경의 그림, 조병준 시인의 시와 사진 등이 걸리고, 여관 옆 신축 전시실엔 조성룡의 소록도 프로젝트와 관련한 도면·사진·모형·영상 등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보안여관이 미시적 생활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선보이는 ‘추적자’ 연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11일(오후 2~6시)엔 ‘소록도의 보존과 재활용’을 주제로 조경만(문화인류학·목포대), 김민수(디자인비평·서울대), 정진성(역사·부산교대), 조인숙(문화재보존·다리건축), 김영현(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 등 전문가들이 참가하는 1차 심포지엄이 열린다. 2차 심포지엄이 예정된 25일(오후 2~6시)엔 근대문화의 보존과 활용, 소록도의 미래와 비전을 다루는 ‘소록도에서 보안여관까지’를 놓고 조성룡 건축가와 함께 윤인석(건축학·성균관대), 김원식(건축역사비평), 최성우 대표 등이 논의를 이어간다. (02)720-8409.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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