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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투쟁 이면 민초들의 초상 찾은 경전

등록 2017-12-04 18:54수정 2017-12-04 21:20

【내 인생의 사진책】 로버트 프랭크 <미국인들>

<미국인들> 표지
<미국인들> 표지

1987년쯤의 일이다. 사진에 미쳐서 카메라를 옆에 끼고 살던 시절, 나는 한 작은 극단의 홍보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연극에 참여했던 교수님 한 분이 내 사진이 썩 마음에 들었던지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진사 책이며 미술사 등을 읽으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고, 사진에 대한 열망은 많았지만 실제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많았다. 때마침 사진사 책에서나 겨우 주워들을 수 있었던 사진집 한 권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그 책은 당시 한국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당시 미국에 유학중이던 그 교수님의 제자를 통해서 구할 수 있었다. 그런 사연 끝에 손에 들어온 사진집이 바로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1987년이 어느 때인가? 거리마다 온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군부독재 타도를 부르짖던 시기. 결국 민주화의 열망도 물거품이 되어 전두환의 후계자가 다시 권력을 잡고, 그 민주화의 열기는 다시 산업현장의 노동운동으로 확산되어 온 나라 거리거리가 이틀이 멀다 하고 집회의 열기로 뜨거웠다. 내 주변에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친구들은 죄다 시위현장으로 몰려갔고, 내외신 언론사 기자들을 비롯해서 운동권 사진가들과 프리랜서들, 사진깨나 한다는 친구들은 죄다 집회현장으로 출석을 하다시피 했다. 화염병과 짱돌, 페퍼포그와 지랄탄, 심지어는 분신사태까지 시위현장이자 사진현장은 그야말로 피 튀기는 아수라장. 당시 사진을 하던 친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들의 소망은 한결같이 ‘악!’ 소리 나는 충격적인 사진을 찍는 것. 하지만 나는 그런 현장은 내가 카메라를 들이댈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세월이 흐르고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그러시오. 나는 비명 소리가 아니라 인민들의 신음 소리, 한숨 소리가 묻어 있는 사진을 찍겠소.’

그렇다고 내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노동자들의 현실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 사고 사진들이야 기자들의 몫이고, 나만은 그런 투쟁현장의 이면에 있는 일상에서 나의 사진거리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사진을 하는 친구들은 시위현장에 관심이 없는 나를 비아냥하기도 했고, 회색분자로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고, 카메라를 든 룸펜 정도로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어간에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의 책 한쪽 한쪽을 마치 이슬람교도가 코란경을 읽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사진도 역시 사건 사고는 없고 당대의 미국을 살아가는 일상인들, 심지어는 텅 빈 식당에 혼자 켜져 있는 텔레비전 사진까지.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사진들을 찍었을까? 과연 그는 미국 사회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의 사진 한장 한장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읽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조금씩 그의 사진세계가 나에게 다가오면서 그의 사진들은 조용한 충격과 동시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욱 사진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1989년 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정말 이 땅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민초들의 초상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문호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문호

1950년대의 미국 사진을 이야기할 때 나는 유진 스미스와 로버트 프랭크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유진 스미스는 익히 알다시피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세기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작업을 해온 전형적인 ‘공적’ 사진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비장한 선언문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로버트 프랭크는 공적인 사건들은 관심을 두지 않고 아주 ‘사적인’ 시각으로, 어찌 보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상적 광경들로 미국 사회를 ‘기록’했다. 그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친구가 때로는 은근하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슬픈 어조로 들려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어떤 사진은 우울한 시 한 편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사진은 끈적거리는 재즈 한 곡을 듣는 것 같다. 우리가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을 제쳐두고 50년대의 미국을 사진으로 온전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후 그 책이 밑거름이 되어 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 결과물을 2009년에 <온더로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 스승이 되어준 사진가들은 많았지만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은 다른 어떤 사진집보다도 나에게는 경전과도 같은 책이었다.

바로 이 한 권의 책을 시작으로 이후 로버트 프랭크의 다른 저작들은 물론 사진사에 족적을 남긴 대가들의 사진세계로 빠져들게 되었고, 그런 선배 사진가들의 작업에서 얻은 영감이 동력이 되어 나는 아직도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문호(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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