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 나온 해강 김규진의 대작 벽화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왼쪽)와 <총석정절경도>(오른쪽). 두 작품은 1920년 완성된 이래 2015년까지 창덕궁 희정당의 대청마루 동서쪽 벽에 걸려 있었다. 그 뒤 1년여간의 보존수리 과정을 거쳐 지난 12월부터 처음 일반 관객 앞에 선보이는 중이다.
초록빛 동해 바다에서 돌기둥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처음엔 하나둘 솟아오르더니 나중에 떼를 이뤄 거대한 산을 이루며 뻗어간다. 수천만년 전 생겨난 주상절리 바위들의 융기와 약진을 담은 강원도 금강산 북쪽 총석정의 풍경이 길이 8m를 넘는 비단 화폭에 펼쳐졌다.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 화단의 실력자였던 해강 김규진(1868~1933)의 대작 <총석정절경도>는 장쾌하다. 바다에서 배 타고 보는 총석정 장관의 진수만 뽑아 파노라마식으로 극대화시킨 이 그림은 보는 이를 한달음에 압도한다.
지금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총석정절경도>와 구름에 뒤덮인 외금강만물상의 기암괴석 무더기들을 같은 크기의 화폭에 그린 해강의 또다른 대작 <금강산만물초승경도>를 감상할 수 있다. 두 그림은 1920년 완성된 이래 창덕궁의 국왕 처소였던 희정당에 90년 넘게 걸려 있었다. 오랜 세월 습기에 노출되고 표면이 찢어지는 등 훼손이 심해지자 2015년 떼어 약 2년간 보존처리를 마치고 지난 12월13일부터 특별전시(3월4일까지)를 통해 97년 만에 처음 관객 앞에 선보이는 중이다.
희정당 벽화 2점은 전통회화와 근대기 사실주의 회화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해강의 대표적 걸작이다. 희정당이 1917년 불탄 뒤 경복궁의 임금 침전이던 강녕전 전각을 뜯어 다시 지어지자 조선 왕실의 후신 이왕가가 당시 1300여원의 거금을 주고 해강에게 작업을 부탁해 희정당 벽 양쪽에 마주 보는 구도로 내걸리게 된 그림들이다.
원래 궁중장식화는 일월오악도나 십장생도처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길상물을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감상하는 진경산수화로 유행한 금강산을 소재로 과감히 끌어들여 사진처럼 사실적인 시선과 묘사, 채색 등으로 현장감을 이끌어냈다. 궁궐에 갇혀 학계에도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걸작이란 점에서 전시는 일대 사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연구자들은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우리 미술사에서 결코 자부심만으로는 평가하기는 어려운, 복잡한 맥락을 지닌 작품”이라고 기획자인 이홍주 연구사는 말한다. 그 맥락은 무엇인가.
조선 왕조 500여년 동안 궁궐에 이렇게 큰 벽화는 그려진 바 없다. 임금 처소에 거대한 산악사진처럼 금강산 벽화가 양쪽으로 펼쳐지는 구도는 명백히 근대적인 시선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이런 파격이 조선 궁궐을 격하하려는 일제의 통치술 차원에서 기획됐다는 의심을 벗지 못한다는 데 있다.
희정당은 원래 임금의 내전이면서 신하들과 친근하게 어울려 국사를 논하는 집무 공간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한일병합 뒤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이 총독부, 이왕가 관계자들을 만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변질된다. 게다가 1917년 희정당과 대조전이 불타버리자, 일제는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와 새로 짓게 했다. 겉모양은 전통 궁궐이었지만, 남쪽 정면에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현관을 내고, 내부에는 샹들리에와 커튼박스를 만드는 등의 양식 얼개를 뒤섞어버렸다. 여기에 덧붙인 벽화 설치가 누구의 구상이었는지는 공식 기록이 없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들끓는 민심을 회유하는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당시 근대 관광의 중추로 떠오른 금강산을 소재로 한 벽화를 구상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추정이 나온다. 해강 또한 그가 이끈 서화미술회가 당시 총독부 고관의 자제와 부인, 관료 등에게 강습을 열었다는 내력을 고려하고 보면,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희정당에서 살다 1926년 눈을 감은 순종에게 해강의 벽화는 어떻게 비쳤을까. 부모 고종과 명성왕후가 쉬었던 강녕전, 교태전을 마구 뜯어 와 지은 새 희정당을 보며 그의 마음은 찢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공간에 낯설게 그려진 금강산 벽화가 마냥 달갑게 다가올 리는 없었을 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