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진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사진의 기록적 기능이 사진 매체의 기원과 맺는 돈독한 관계 때문이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이전까지 사진은 삶의 장면들을 기록하는 것, 삶의 사건들과 관련된 기억을 사실적인 이미지로 담아내는 기록적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와 비디오라는 매체의 발달은 현실의 기억과 역사적 장면의 보존이라는 사진의 특권을 와해시켰다. 특히 동영상을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컴퓨터와 인터넷 같은 기술의 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기록을 위한 특별한 매체로서의 사진의 증거 기능도 상당히 약화시켰다.
미국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의 작품은 사건이나 삶을 기록한 사진이 아니다. 작가는 1990년에 발간된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이라는 사진들을 통해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벗어나 소위 말하는 연출사진 혹은 구성사진의 대표적인 작가가 된다. 1954년생인 신디 셔먼은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이기도 하고, 예술적으로 작가의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출사진들의 특징은 현실의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개념적 상황을 미리 구성해 놓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 없지만 셔먼의 <무제 필름 스틸> 작품집을 처음 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뉴욕의 서점에서였다. 당시 수업을 마치고 항상 들르는 대형 서점에서 유학생으로서 이론서보다 상대적으로 고가인 사진집을 살 수 있는 여력은 없었고, 진열되어 있던 사진집들을 탐독하면서 현대 사진의 방향성에 관한 시각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초기 사진부터 현대의 포스트모던 사진가들을 관통하는 감성은 그들이 이미지를 현실에 대응시키는 방법이었다. 기록적인 사진이든 연출적인 사진이든 이들의 사진은 피사체에 대해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하게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들과는 달리 셔먼의 사진에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다중적인 삶의 모습들이 우리의 삶과 조응하는 특별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셔먼의 사진 이미지는 미술에서 재현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던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필자에게 하나의 철학적 문제를 던져주었다. 작가의 예술적 개념에 따라 의도된 연출사진의 범주에 속하는 셔먼의 사진에서 재현적인 시각예술의 전통과는 다른 현대적 상징들의 탄생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회화는 현실을 모방하여 인간의 삶이나 사건들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매체이다. 영화 역시 시간이 개입되기는 하지만 현실의 모방을 통해 이미지들을 구성하여 허구적으로(혹은 서사적으로) 재현한다는 면에서 회화와 많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셔먼은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현실을 직접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만들어져 왔던 현실을 모방해 재현한 영화 속 주인공으로 분장을 하고 자신의 자화상을 찍는다. 말하자면 재현을 통해 모방된 인물의 이미지를 모방하여 작품을 구축한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촉발되는 몇 가지 해석적 관점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모방으로 구축된 모방을 실행함으로써 플라톤의 모방론과 원형의 경계 속으로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셔먼의 사진은 분명히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분장해 사진을 찍은 모방 행위이지만 모방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진다. 작가의 사진에서 작가 자신과 예술의 관계가 모방의 차원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작가의 사진을 통해 당시 탈중심과 해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반영된 다중적인 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자아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자아가 스펙터클한 대중매체와 뒤섞여 있는 환경에서 오히려 삶은 점점 더 강력한 마약처럼 개인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마지막 세 번째로 기존의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매체 예술과 달리 21세기를 향해 가는 새로운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작가가 자화상으로 찍은 영화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온전히 개념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환상의 차원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미디어 아트에서 말하는 비물질적인 가상현실을 상기시킨다.
안드로이드적인 감성지능의 기술혁명 시대가 이미 21세기의 화두가 되었다. 현실과 자아가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예술의 시대도 예감할 수 있다. 다중적 정체성을 자아 해석의 상징으로 활용한 신디 셔먼의 작품에서 예술의 실험적 진보성과 미래적인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정용도(미술비평가)
제목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의 회화의 상황을 신디 셔먼의 사진과 의미론적으로 비교하여 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