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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광화문 현판 수난사에 끼어든 ‘정치’

등록 2018-02-14 08:00수정 2018-02-14 09:22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박정희, 원형 무시 ‘한글 현판’ 걸고
참여정부 글씨체 교체에 논란 일자
원본체 찾기 급급…색상 고증은 뒷전
MB 땐 “G20 정상회의 때 맞춰라”
속도전 복원에 석달만에 금가
1968년 3월15일 콘크리트 광화문 기공식 당시 세워진 투시도. 투시도에 그려진 광화문 현판을 자세히 보면 한자로 문 이름이 적혀 있다. 애초 광화문 재건 당시 한글이 아닌 한문 현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사진이다.
1968년 3월15일 콘크리트 광화문 기공식 당시 세워진 투시도. 투시도에 그려진 광화문 현판을 자세히 보면 한자로 문 이름이 적혀 있다. 애초 광화문 재건 당시 한글이 아닌 한문 현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사진이다.
“광화문 현판 복원이 왜 이렇게 늦어졌나요?”

“2016년 2월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된 옛 현판 사진이 새로 나타난 뒤 바탕색 정밀 분석이 이뤄졌습니다.”

“광화문이 복원된 2010년 이후에도 시민단체 등에서 현판 색상에 의문을 제기해오지 않았나요?”

“바탕색을 검증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가 소장한 도쿄대, 국립중앙박물관의 옛 현판 사진과 달리 스미스소니언 사진은 지금 내걸린 흰 바탕, 검은 글씨 현판과 반대되는 특징이 보였어요. 그래서 실험하게 됐고, 검은 바탕, 금박 글씨 결론을 내놓게 된 겁니다.”

지난달 30일 열린 문화재청 새해 업무계획 간담회에서 취재진과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실무자들 사이에 오간 문답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답변의 겉 문맥만 보면, 청은 새 증거에 따라 역사성이 큰 현판에 합당한 조처를 취한 듯하다. 실제로 문화재청 궁능과 쪽은 지난해 검은색, 흰색 등 4종의 바탕색과 금박, 흰색, 코발트색 등 5종의 글자색을 입힌 실험용 현판을 8종이나 만들어 광화문 지금 현판 자리 위에 올려놓고 옛 사진들의 추정 촬영시간대에 맞춰 찍으며 색깔을 찾으려 공을 들였다.

하지만 현판의 역사와 착오, 논란으로 얼룩진 그간의 복원 내력을 살펴보면 청의 답변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판 원형 글씨가 일본 도쿄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소장된 1902년, 1916년 촬영 유리건판 사진들을 토대로 확인된 건 2005년 2월 유홍준 전 청장 재임 시절이다. 청은 고종 때 무관 임태영이 쓴 원본 글씨체를 이 옛 현판 사진들에서 디지털 복원하는 방식으로 재현해 당시에 공개했다. 그 뒤 문화재위원회 결정에 따라 2006년 콘크리트 광화문 철거와 광화문 원형 복원 작업이 시작됐고, 2009년 임태영 글씨는 문화재위원회에서 복원 뒤 내걸 새 현판 글씨로 확정된다. 글씨체는 13년 전, 현판 자체는 9년 전 검증을 통해 이미 정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쳐 2010년 8월15일 복원식을 연 광화문의 현판은 석달 만에 여러곳에 금이 가서 그해 12월 재교체 방침이 정해졌다. 그리고 8년 뒤인 올해 1월에야 색상 교체까지 결론짓는 지각 수정이 이뤄지면서 현판 재복원은 무려 10년 이상 끌면서 겨우 갈무리되는 모양새가 됐다.(현판 단청을 칠하는 방식은 아직도 1년간 더 실험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의문이 생기는 건 이 현판 교체 대장정(?)의 전말이다. 왜 제대로 검증하고 따지는 과정이 현판을 번듯이 복원한 사실을 공표하고 누각에 내건 다음에야, 그것도 한참 지나서야 시작된 걸까? 2010년 8월15일, 민족유산의 제자리 찾기, 법궁인 경복궁 위상 회복 등을 내세우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펼쳐졌던 광화문 복원식은 졸속 검증을 덮기위한 ‘쇼’에 불과했던 것일까.

2005년 당시 현판 고증을 지켜봤던 문화재청과 학계의 관계자들은 현판 스캔들의 발단이 2005년 1~2월 정치권을 진동시킨 정조 어필 논란에서 비롯되었다고 짚고있다. 유 전 청장이 광화문 누각에서 박정희 현판을 내리고 개혁군주 정조의 어필을 집자해 새 현판을 올린다는 추진안을 밝히자 정치권에서 유례없이 격렬한 논란이 번졌다. 당시 한나라당 등 보수야권에서는 역사왜곡, 정치보복이란 반발이 거셌다. 문화재계에서도 섣부른 안이란 반응들이 나오자 문화재청은 수습책으로 원본 글씨를 찾는 대안에 골몰했다. 광화문 현판 글씨는 당시까지도 명확한 글씨체가 보이는 원본 자료들이 없었다. 심지어 학계는 대개 원본 글씨를 쓴 이가 19세기 예인 정학교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현판 글씨를 고증하는 과정에서 <경복궁 영건일기>를 찾아내 임태영의 글씨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청의 한 관계자는 “흐릿한 건판 사진의 현판 바탕색과 글씨체 색깔을 반전시켜 디지털 기법으로 글자 원형을 찾는 것이 중요했지 그외의 바탕색과 글자 색상의 고증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2006년 광화문 복원 공사가 시작되자 담당자들은 궁능과에 조사한 현판 글씨 자료를 넘겼다. 하지만, 색상 고증과 관련해 별도의 검증 실험이나 심층적인 추가 사진자료 수집은 진척되지 않았다. 2010년 복원 직전 열린 현판복원소위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현판을 복원한다는 안을 정하면서 색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맞춰 광화문 복원 공사 기간을 연말에서 9월, 7월로 두번이나 단축하는 속도전을 압박했다. 청의 한 간부는 증언했다. “당시 국가대사를 앞둔 상황에서 시간 걸리는 현판 검증 실험과 자료수집을 해야 한다는 말을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뒤 2016년 지금 현판과 정반대인 스미스소니언 옛 사진이 나오자 궁능문화재과 쪽은 여론에 얻어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대책회의에서 재복원안이 다시 뒤집히지 않도록 여러 개의 실험용 현판을 만들어 검증하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제안이 나오자 그들은 반색했다. 실험시간을 핑계로 면피할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곡절은 박정희 정권이 68년 재건한 콘크리트 광화문 건립 과정에서도 있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팀장이 2015년 쓴 명지대 석사논문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을 보면, 68년 12월11일 완공식을 열고 공개된 콘크리트 광화문의 현판은 원래 박정희의 한글 글씨가 아닌, 한자로 쓰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논문에는 그해 3월15일 기공식 날 중앙청 앞에 걸린 완공 투시도의 사진이 실려있다. 투시도를 자세히 보면 현판 글씨는 한자다. 공사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콘크리트 광화문의 현판은 강골 기운이 담긴 예서체 한글로 바뀌었다. 강 팀장은 “당시 한글 전용화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와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의 추진 등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전 원래 광화문 현판을 숱하게 보았던 당시 학계 중진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은 무시된 채 추진됐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이 한글 현판도 이듬해 9월 원판을 갈아버리고 그 위에 좀더 필체가 유연한 행서체의 박정희 글씨를 새겨 다시 면모가 뒤바뀌게 된다.

정치권력이 움직인 광화문 현판의 변천사는 복잡다단하다. 1866년 고종의 경복궁 중건으로 문루에 내걸린 이래 1927년 조선총독부를 지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 동쪽 구석에 문과 함께 옮겨졌고, 1951년 1·4후퇴 즈음 문과 함께 불타 사라진 뒤엔 17년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 1968년 12월, 경복궁 축선에서 6.5도나 비뚤어져 사실상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정문이자 선전탑 구실을 했던 콘크리트 광화문이 세워지자 박정희 친필 현판이 다시 내걸리게 된다. 박정희의 현판은 원형 복원을 위해 문 철거가 진행되던 2007년까지 39년을 버티다 슬그머니 떼어져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2010년 임태영의 원본 글씨를 살려 내걸었다는 새 현판은 균열과 색상 시비 등 숱한 부실 시비 끝에 재교체가 결정돼, 내년에 다시 떼어질 처지에 놓였다. 그러니까 152년 세월동안 현판이 다섯번이나 바뀌게 된 셈이다.

광화문 상징인 현판은 지난 150여년간 정치사 격랑 속에서 소실과 훼손은 물론, 현판의 필자·글씨체·바탕 색깔·규격 등에 대한 온갖 정치적 관여와 압박을 받으며 모양새가 계속 바뀌는 질곡을 견뎌야 했다. 권력자들에게 밉보이지 않게, 시키는대로 재건·복원 과정의 편법과 속도전을 용인하고, 책임은 문화재위원 등의 전문가와 윗선에 돌리며, 자신들은 빠져나가는 문화재 공무원들의 보신주의가 그때 그때 국면마다 절묘하게 작동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번 현판 색상 교체의 전말도 그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68년 12월11일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 준공식 뒤 광화문 중문을 통과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전용차. 당시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1968년 12월11일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 준공식 뒤 광화문 중문을 통과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전용차. 당시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간담회에서 문화재청 사람들은 현판 복원 부실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권력 앞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힘없는 관료 조직이라고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재 복원과 수리에 ‘정답은 없다’는 철칙을 얼마나 생각해왔는지는 의심스럽다. 10년 사이 부실복원, 논란 흔적을 덕지덕지 남긴 광화문 현판이야말로 청이 이런 철칙을 홀대해왔음을 존재 자체로 증언하고 있다.

원형 복원과 복원유산의 역사적 진정성, 철저한 고증 성과에 대한 공감대가 모여지기 전까지 섣부르게 ‘복원 끝’을 공표하는 건 금물이다. 권력의 압박을 탓하기에 앞서, 이런 원칙을 지켜내지 못하고, 2010년 현판 복원을 ‘쇼’로 전락시킨 역사적 책임에서 문화재청 관료들은 벗어날 수 없다. 1년간의 뒤늦은 색상 실험을 거쳐 원래 현판이 불탄지 67년만에 원형을 얼추 되찾게됐다는 사실에만 흡족해할 수 없는 이유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자료 강임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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