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열흘 연휴에 견주면 이번 설 명절은 아쉽게도 너무나 짧다. 멀리 가서 거하게 놀지는 못해도 동네 인근을 어슬렁거리며 최근 새로 문을 연 따끈따끈한 공간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보시라. 남기준 <환경과 조경> 편집장과 최근 <인문학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을 펴낸 ‘골목길 전문가’ 김란기씨가 발길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전국의 보물같은 장소 10곳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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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 예술로 흘러넘치네, 문화비축기지
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 인근의
문화비축기지(마포구 증산로 87)는 오일쇼크에 경제가 휘청이는 충격을 목도한 박정희 정부가 서울시민이 한달 정도 소비할 수 있는 양인 6907만ℓ의 석유를 보관했던 석유비축기지를 모태로 한다. 1976~78년 매봉산 남쪽 경사지 암반을 굴착해 만들어진 석유탱크는 지난 41년간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된 1급보안시설이었다. 2002년 월드컵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석유비축기지는 위험물 저장 시설로 분류돼 폐쇄돼 2014년까지 버스 주차장·월드컵대교 현장 사무실 등으로 쓰였다. 2013년 시민아이디어공모를 통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난 문화비축기지는 기존의 건축물을 알뜰히 재활용해 산업시대의 ‘거친 아름다움’을 잘 드러냈다. 높이 15m, 지름 15~38m의 기존 유류보관 탱크 5개 중 4개는 공연장·강의실·이야기관 등으로 꾸며졌고, 기존 탱크에서 해체된 자재를 이용해 만든 한 개의 탱크는 카페테리아·회의실 등을 갖춘 커뮤니티센터로 쓰인다. 연휴 무휴. 02-376-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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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니즘의 진수를 보여주마, 서울 연희동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 골목길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최근 가장 ‘핫’하다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연남동엔 맛집도 많지만 집 구경하는 맛도 짭짤하다. 1960년대 지어진 연희동의 단독주택들이 카페, 옷가게, 식당 등으로 바뀌었는데, 노출 콘크리트 외장, 외부 계단, 선큰, 넓은 창 등 그 모습이 비슷비슷하면서도 각자 개성이 살아 있다. 이 지역에서 건축업을 하는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의 작품이다. 1993년부터 연희동에서 산 김 대표는 이 동네에서 50채가 넘는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창조”했다. 튀지 않고 동네의 통일성에 기여하는 김 대표의 건물은 “소통, 대화, 연계와 맥락의 디자인” “사유재산과 도시의 대화간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는 현실의 교과서”(최이규 계명대 교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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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찾기 놀이, 서울 필동 스트리트뮤지엄
서울 지하철 충무로역 4번 출구로 나와 남산한옥마을 방향으로 2분간 걸으면 곳곳에서 작은 미술관들을 만날 수 있다. 한옥마을 안팎에 모퉁이, 이음, 우물, 골목길, 둥지, 사변삼각, 컨테이너, ㅂㅂㅂㅂ벽 등 8개의 스트리트뮤지엄이 펼쳐져 있다. 골목길, 이음, 우물은 한옥마을 안에 있고, 나머지는 골목길 여기저기에 숨겨져있다. 버려진 자투리 공간에 꾸며놓은 설치미술품들이 행인들을 반갑게 맞는다. 스트리트뮤지엄 관람 방식은 인포메이션센터에 가서 스탬프종이를 받은 뒤 스트리트뮤지엄 8개를 모두 돌면서 도장을 찍는 것이다. 인포메이션센터 옆 건물에 있는 베이커리24에서 도장 8개가 찍힌 스탬프종이를 보여주면 음료 할인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현재 베이커리24의 2층 특별전시관에선 한성필, 정다운 작가의 2인 기획전 ‘겹, 쌈,’ 이 열리고 있다. 연휴기간엔 가이드 투어는 진행하지 않는다. 02-227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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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의 다양함, 청량리 부흥주택단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부흥주택 단지. 김란기 제공
1958년 서울시가 택지조성을 시작해 건설된 곳. 당시 개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담은 주택단지라 이름도 ‘부흥’. 60년 세월 동안 500채 가까운 집들과 당시 조성된 골목길이 원형 가까이 보존돼 있다. 물론 집들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늘리고 손질을 했지만 옛 골목길의 정취는 그대로 살아 있다. 이 땅의 유래를 더 거슬라올라가면, 본래 이 지역은 창덕궁 대지였는데, 일제가 들어선 이후 이곳을 청량공원으로 지정돼 모든 개발행위가 금지됐다. 이후 산림연구원, 과기원 등이 들어섰고 일부는 부흥주택 단지로 탈바꿈했다. 인근의 홍릉은 조선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가 있어 구한말의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다.
■ 공룡이 전시된 동굴, 광명동굴
1912년 문을 열어 1972년까지 금·아연·구리 등을 채굴하던 광명시 가학광산(광명시 가학동 85길 142)이 테마파크로 변했다. 회사 부도로 폐광이 된 이곳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소래포구 젓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됐으나 광명시가 안전 보수작업 등을 거쳐 전시공간·와인 시음장과 저장소 등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지방자치단체단체가 주도한 프로젝트이지만 ‘관급 냄새’가 전혀 안 나고 알찬 전시물, 깔끔한 시공 등이 돋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현재는 광명돌굴 내 라스코전시관에서 ‘공룡체험전’이 열리고 있다. 5억5천만년 전 선캄브리아대의 지질층이 있는 동굴에서 쥐라기 시대 공룡들을 만날 수 있다. 실종된 공룡박사님을 찾아 떠나는 여행 형식으로 이뤄지는 체험형 전시다. 이 동굴은 주차는 동굴 바로 아래의 ‘광명시 자원회수시설’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개봉·철산·광명역에서 17번 버스를 타면 동굴까지 바로 갈 수 있다. 070-4277-8902.
■ 도시의 작은 쉼표, 광주폴리 I, II, III
‘예향’ 광주는 최근 공공미술로 새롭게 조명받는 도시가 됐다. 도시 곳곳에 실력있는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소형건축물을 설치하는 ‘폴리 사업’이 2011년에 시작돼 지난해 3차 사업이 마무리됐다. 1차 프로젝트에선 11개, 2차에선 8개, 3차에선 11개 등 지금까지 모두 30개의 폴리가 만들어졌다. 폴리란 본래 장식적 역할을 하는 소형건축물을 뜻하는데, 광주 폴리는 활력을 잃어가는 도시를 살리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특히 산수동과 충장로를 무대로 한 3차 프로젝트에선 1, 2차에 비해 기능성과 실용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년 실업과 공·폐가 문제를 식당과 카페라는 테마로 풀어낸 <쿡폴리>, 아시아문화전당과 무등산을 바라보는 곳에 쉼터를 제공한 <뷰폴리>,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곳에 만들어진 <아이 러브 스트리트>, 시민공모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뻔뻔폴리> 등이 있다. 거리를 걷다가 쿡폴리 카페 콩집(금요일 16일은 휴무)에서 뜨거운 차 한잔도 좋겠다.
■ 대구 공구거리에서 시간여행을
탱크도 만들 수 있는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서울 사람들은 청계천을 가리키겠으나 대구 사람들에겐 북성로가 정답이다. 1950년대 미 군수물자용 공구를 유통하는 상점들이 형성됐다고 하는데, 대구·경북 일대에서 쓰이는 공구는 대부분 이곳에서 공급했다고 알려져있다. 도심에서 가깝고 임차료가 싼 장점 때문에 공방, 카페, 작업실, 건축사사무실 등이 잇따라 문을 열면서 불황을 앓던 이곳도 활기를 얻었다. 폐업한 공구 가게 주인이 문을 닫으면서 기증한 제품들을 전시하는 공구박물관(중구 태평로 2가)도 생겨났다. 1930년대 쌀 창고로 쓰였던 근대건축물을 개조해 만들었으며, 기술자 작업공간 등을 재현해놓았다. 적산가옥을 개조해 2층에 다다미방을 들인 믹스카페 북성로 등 특이한 가게들을 들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공구거리 뒷골목 향촌동엔 시간이 멈춘 듯 일제시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향촌동은 6·25전쟁으로 피난온 예술가·문인들이 드나들던 곳으로, 시인 구상, 화가 이중섭 등의 추억이 어린 곳이다. 김란기 박사는 “대구는 골목답사 여행이 많이 활성화된 곳이지만, 향촌동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아 거의 손이 타지 않았다”며 공구거리와 함께 향촌동을 둘러볼 것을 권했다.
■ <1987> 연희가 살던 곳, 목포 다순구미
영화 ‘1987’를 촬영한 목포 다순구미 마을. 목포시가 세트장으로 지어졌던 ‘연희네 슈퍼’를 재현해 놓았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따뜻한 포구라는 뜻의 다순구미(다순은 따습다, 구미는 강·바닷가의 후미진 곳을 일컬음). 유달산 아래 있는 온금동 다순구미 마을은 일제시대 벽돌공장이 있던 곳으로 꽤나 번창하던 마을이었다. 오래된 낡은 주택들과 좁은 골목길, 가파른 계단이 유명한 이곳은 관객 700만여명을 동원한 영화 <1987>에서 연희가 살던 동네로 등장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목포시는 연희네 슈퍼를 재현해 관광상품으로 꾸며놓았다. 연희네슈퍼 뒤에 태평양전쟁 말기 공중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형 방공호도 남아 있다. 김란기 박사는 “다순구미는 가난한 어부들의 달동네였다. 바다에 나간 아버지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비슷해 아이들의 생일이 같다는 말이 나오는 사연 깊은 동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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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거리, 인천 배다리마을
배다리마을의 터줏대감 아벨서점. <한겨레> 자료사진
인천 동구 금곡동 일대, 배다리마을은 19세기 말까지 마을 어귀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닿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예전에 인천 사람들은 저렴하게 책을 사려면 배다리마을에 갔다고 하는데, 지금도 헌책방들이 남아 있다. 1973년부터 영업을 해온 이 지역의 터줏대감 아벨서점(16일에만 휴무)에 들러보자. 책방이자 마을쉼터 역할을 하고 있는 나비날다(휴무일 없음)에선 오붓하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주인이 직접 리폼한 소품과 옷, 허브차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지은 지 100년이 넘는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인 영화초등학교 등도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배다리마을에 가면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이곳은 인천시의 산업도로 건설 계획과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투쟁이 몇년째 계속되고 있는 ‘개발-보존의 투쟁지역’이다. 양조장을 문화공간으로 꾸민 스페이스빔(연휴 기간 휴무)을 운영하고 있는 민운기 대표 등이 송현터널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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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길 쉬엄쉬엄, 부산 이바구길
부산의 뿌리를 느껴보려면 ‘올라가야’ 한다. 부산 산동네를 가로지르는 길, 산복도로로 향해보자. 산복도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초량동 이바구길. 이바구란 이야기가 있는 길이란 뜻. 이곳의 가파른 ‘168계단’ 앞에 서면 입이 딱 벌어진다. 로프웨이가 개통해 단번에 올라갈 수 있지만 계단 중간중간 쉬어가며 부산시내 전경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있다. 1922년 지어진 옛 백제병원, 아이유가 ‘밤편지’ 뮤직 비디오를 촬영한 일본식 가옥 정란각(1943년) 등 인근의 근대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