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이 1930년대 조성한 서울 익선동 근대한옥단지의 전경. 맨 아래쪽에 한지붕을 이고 필지를 나눠 별도의 가구 2채를 들인 얼개가 보인다.
서울 북촌은 고단하다. 옛 살림집 ‘한옥’에 얽힌 세간의 온갖 오해와 무지가 동네를 옥죈다. 조선시대 양반 권세가들이 살던 고고한 한옥촌으로 바깥 사람들은 지레 단정하기 일쑤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려와 한복 입고 사진 찍으며 풍경을 소비하는 눈요깃감의 명소로도 치부된다.
요즘 일반인들이 북촌으로 점찍는 곳은 가회동, 삼청동, 계동, 익선동처럼 한옥이 밀집한 동네들이다. 원래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 북쪽, 서쪽의 경복궁과 동쪽의 창덕궁 사이 드넓은 지역을 일컬었다. 당장 눈에 남는 한옥촌만을 잣대로 북촌을 떠올리다 생긴 오해다. 게다가 가회동, 익선동 한옥들이 조선시대부터 전해져온 전통집들이라고 추어올리는 이들이 많다.
국내 도시 주택개발사업의 선구자로서 근대한옥단지를 보급한 정세권의 생전 모습.
정기황 박사 등 건축사학자들이 최근 논문에서 밝혀낸 진실은 다르다. 서울의 대표 명소인 가회동 한옥동네의 역사는 80여년 정도다. 조선시대는 물론 1920년대까지 과수원과 울창한 숲이었다. 토박이들 살던 곳도 아니다. 30년대 등장한 가회동, 삼청동 주택가는 당시 ‘강남 8학군’으로 지방 토호들이 주민들이었다. 부근에 경기고보, 중앙고보 등의 명문학교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교육열에 들뜬 지방 부호들은 유학 온 자식을 뒷바라지하려고 가회동 언덕배기 신흥주택가에 앞다퉈 입주했다. 또다른 명소인 익선동 한옥촌도 20년대까지 일반인들은 접근 못한 왕실의 누동 별궁 영역이었다. 가회동, 익선동 등 북촌 한옥지구 역사는 조선의 전통시대가 아니라 근대 일제강점기에 출발한 셈이다. 왜 이런 오해와 무지가 생겼을까. 그 과정을 좇다 보면 한국인들이 반세기 넘게 잊어버렸던 건축사업의 귀재를 만나게 된다. 기농 정세권(1888~1965). 한국 근대 도시건축사업의 선구자이면서도 학계에서는 ‘집장사’로 폄하되었던 그에 얽힌 망각과 굴절의 역사는 북촌의 사연 많은 지난날과 깊이 맞물려 있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군 하이면 출신으로 진주에서 낙육고등사범학교를 나와 면장까지 했다. 3·1운동 이후 서울로 와서 조선 최초의 근대 주택개발업체 ‘건양사’를 세웠다. 그는 20년대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오늘날 명소가 된 가회동 31, 33번지와 익선동의 한옥단지 등 서울 사대문 안팎 곳곳에서 근대 한옥 건립, 분양사업을 하면서 부를 일궜다. 당시 금융사업가들이자 가회동 일대 숲을 소유했던 한상억, 민영휘, 이재완 등 친일파 귀족들은 당시 지방인들의 교육열을 업고 가회동 땅에 택지 사업을 추진했는데, 기농은 이들한테서 불하받은 택지에 대단위 한옥단지를 지어 분양했다. 인사동·낙원동·창신동·성북동·돈암동·보문동 등 사대문 안팎과 왕십리, 뚝섬 등 교외지역까지 주택사업은 확장됐다. 특히 실내공간 안에 사랑방, 행랑채, 안방, 부엌 등이 통합된 이른바 도시형 근대한옥(개량한옥)을 본격적으로 보급한 것은 당시 주택난에 시달리던 서민 중심 주거정책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혁신적인 성과로 평가받는다.
익선동 한옥단지 들머리에 2016년 설치된 단지의 설계자 정세권을 기념하는 패널판. 그의 초상그림과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다.
기농은 친일파와 사업하며 번 돈을 항일운동에 쏟아부었다. 물산장려운동, 좌우합작운동 신간회의 물주였고,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우리말큰사전을 만든 조선어학회의 열정적인 후원자였다. 급기야 1942년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고, 뚝섬의 거대한 자기 땅을 일제에 빼앗기며 사업을 접어야 했다. 기농이 지은 가회동 집에 살기도 했던 소설가 이광수는 ‘조선의 건축왕’이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정세권은 50년대 낙향한 뒤에도 ‘기본사’라는 농촌공동체 조합운동에 사재를 털어넣었고 자택도 아닌 정씨 재실에 살다가 77살에 빈손으로 훌훌 세상을 떠났다.
80년대 말부터 건축사학계에서 조금씩 재조명되기 시작한 정세권의 행적들은 지난해 도시사 연구자인 김경민 서울대 교수가 그의 생애를 정리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시개발로 토지,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디벨로퍼’의 선구자로서 기농의 발자취를 조명한 저술이었다. 뒤이어 서울시는 지난달 북촌에 남아 있는 정세권의 주택사업 유산들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가회동 31번지 서쪽 골목에 자리한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의 한옥집. 축대를 둘러 대지를 조성한 뒤 적벽돌 담을 쌓고 ㄷ자형 집을 지었다. 정세권이 가회동 근대한옥단지를 조성할 당시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집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정세권이 북촌에 지은 근대한옥촌의 흔적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한겨레>는 익선동, 가회동 일대에서 기농이 30년대 조성한 한옥단지의 자취를 살펴보았다. 김 교수가 저술에서 정세권이 서민의 주거난을 해결하고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막기 위한 의도로 추진했다고 풀이한 북촌 한옥단지는 가회동 일대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취재 결과 서민 주거를 고려한 도시한옥 구상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은 수년 전부터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 ‘핫플레이스’로 변한 익선동의 한옥 지구였다.
익선동 근대 도시한옥 대문 위에서 볼 수 있는 딱지형 소로. 문 위 딱지 모양으로 잇달아 붙어 있는 역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부재다. 원래 지붕 아래 받침 용도인데, 근대한옥에서는 단순히 붙이는 장식재가 됐다.
지난 18일 건축사 연구자 김란기 박사와 돌아본 익선동 한옥지구는 정세권이 20년대말~30년대 초중반 가회동 한옥단지와 함께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동네 남쪽 중앙빌딩의 비상계단 난간에서 조망하면 크게 두 개의 블록 구역에 100여채의 ㄱ자, ㄷ자형 한옥들이 줄이어 조성된 전경이 나타난다. 대개 20~30여평 좁은 필지에 방들이 밀집해 붙어 있고, 중앙에 마당을 튼 근대 한옥들이 조밀하게 들어찬 풍경이다. 구역 맨 아래 남쪽엔 한 지붕을 이고 필지를 나눠 각기 다른 가구 2채를 들인 독특한 얼개의 집도 있다. 북쪽 한옥단지 들머리에는 설계자 정세권의 초상그림과 그를 소개하는 패널판이 2016년 설치됐다.
그러나 익선동 근대한옥들은 숱한 개축과 변형으로 원형이 심하게 변질되거나 망가져 있다. 동네 한가운데서 한옥을 개조해 영업중인 개량한복 매장을 들어가봤다. 천장을 쳐다보니 비용을 줄이려고 집 뼈대 핵심인 들보를 얇은 부재로 쓴 게 눈에 들어온다. 들보 양옆에 줄줄이 걸친 서까래를 받친 도리목엔 부재 위치를 표시한 듯한 ‘本’(본)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매장에서 현대한복을 들여다보는 고객들 머리 위로 근대 한옥의 낡고 유약한 부재들을 보는, 기묘한 감회가 밀려왔다. 건너편 집 대문 위에는 근대 도시한옥 특유의 부재인 ‘딱지소로’가 보였다. 딱지 모양으로 잇달아 붙인 역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부재다. 전통한옥에서는 원래 지붕 아래 짜맞춤 받침 용도인데, 근대기에는 양반집을 흉내내 붙이기만 하는 장식재가 됐다. 김 박사는 “이곳의 한옥 리모델링 공사장을 찾아가보면 천장 기와 아래 황토흙을 덮지 않고 싸리나무를 넣어 지붕 하중을 줄이고, 저급한 자재를 써서 공사비용을 줄이려 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며 “염가 시공, 염가 분양에 우선 목표를 두고 서민 살림집을 보급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짚었다. 단지 남서쪽 끝 한옥 보석상가 천장에는 대들보를 아예 두 짝으로 쪼개 각기 나누어 천장에 걸친 모습도 남아 눈길을 끌었다.
정세권이 30년대 조성한 가회동 31번지 한옥촌 모습. 오늘날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한옥촌으로 관광명소가 됐다.
가회동 한옥단지는 양상이 달랐다. 서울 한옥촌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까닭에 정세권 주택사업의 대표작처럼 알려져 있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자녀교육을 위해 올라온 지방 유력자들의 집으로 쓰였다고 한다. 집 1채당 면적이 30~60평으로 익선동보다 훨씬 크고 고급 부재도 사용돼 서민 주거지로는 보기 힘들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공사비를 줄이려는 나름의 고안들을 볼 수 있다. 가회동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함석 차양이 단적인 일례다. 실내 공간을 넓히는 과정에서 짧아진 처마를 보완하기 위해 덧댄 구조물로, 빗물 빼는 홈통이 길쭉하니 아래로 달린 모습이 정겹다. 지붕 받치는 도리를 5개나 걸치는 양반가의 장대한 ‘5량집’ 형식을 훨씬 좁은 필지인데도 칸 폭을 줄여 그대로 수용한 것도 특징적이다. 길가 한옥들의 ‘헐렁한’ 측면 모습을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ㅅ자 지붕 아래 수평으로 걸친 들보에 얇고 생채기가 난 질 낮은 나뭇대를 쓴 구조가 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두 공사비용을 줄이려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정세권이 지은 익선동 근대한옥을 개조해 영업중인 한복매장의 천장 모습. 비용을 줄이기 위해 들보(맨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오는 부재)를 얇은 부재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들보 양옆에 줄줄이 걸친 서까래를 받치는 오른쪽 도리목에는 부재 항목을 표시한 ‘本’(본)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가회동 근대한옥 처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함석 차양. 실내 공간을 넓히는 과정에서 짧아진 처마를 보완하기 위해 덧댄 금속구조물로 새 등의 장식을 달기도 했다.
가회동 근대한옥의 측면. 지붕 아래 수평으로 걸친 들보에 얇은 하급 나무를 썼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공사비용을 줄이기 위한 고안이라고 할 수 있다.
가회동 한옥들은 60~80년대 생활상 필요에 의해 수시로 내외부 개축이 진행됐다. 2000년대 이후 북촌 가꾸기 사업이 진행된 뒤로는 아예 조선시대 한옥풍으로 전면 리모델링하는 게 대세가 됐다. 따라서 정세권 한옥의 원형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31번지 중심길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축대 쌓고 적벽돌 담을 두른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의 ㄷ자형 한옥이 보이는데, 이 집 정도가 그나마 20~30년대 원형을 잘 보존한 사례라는 게 김 박사의 설명이었다. 건축사 연구자들은 기념사업 구체화에 앞서 충분한 사전조사와 정리작업이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세권의 20~30년대 한옥단지 개념을 가장 잘 반영한 주택을 먼저 찾아 선별하고 보존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며, 보존 주택을 시가 어떻게 살아 있는 주거 콘텐츠 공간으로 활성화할지에 대한 논의도 전문가들과 함께 장기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념사업 감독을 맡은 서해성 작가는 “일제강점기 기농이 북촌에 조성한 대단위 근대한옥단지 사업은 일제에 맞서 조선인의 생활문화를 지킨 일상의 항일문화운동 성격이었다고 본다. 서민을 위해 구상한 근대 도시형 한옥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전통주거문화를 지키려 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획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서울시가 27일 낮 가회동 성당에서 기념사업의 첫발을 떼며 마련하는 ‘기농 정세권 선생의 생애와 업적’ 토론회가 어떤 논의를 끌어낼지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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