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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촌 삼계탕집 주차장 터에서 나온 조선왕비 도장

등록 2018-04-16 12:08수정 2018-04-16 20:54

서울 서촌서 ‘내교인’ 2점 출토
서울 통의동 70번지 유적에서 나온 조선시대 왕비의 도장 ‘내교인’2점의 겉모습.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거나 약간 위로 둔 개 모양의 손잡이가 인상적이다.
서울 통의동 70번지 유적에서 나온 조선시대 왕비의 도장 ‘내교인’2점의 겉모습.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거나 약간 위로 둔 개 모양의 손잡이가 인상적이다.
서울 경복궁 서쪽의 이웃동네인 서촌 땅 밑에서 조선시대 왕비가 쓴 도장 2점이 나왔다.

발굴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지난 1월부터 조사해온 서울 통의동 70번지 근린생활시설 예정터에서 조선시대 왕비의 결재용 도장인 ‘내교인’(內敎印) 2점을 찾아냈다고 16일 발표했다. 그동안 알려진 내교인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2점에 불과한데다,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학계의 관심이 쏠린다.

서울 통의동에서 출토된 내교인 도장 아랫부분의 찍는 면(인면) 모습이다. 왕비의 인장임을 표시하는 한자어 ‘內敎(내교)’를 전서체로 새겨넣었다.
서울 통의동에서 출토된 내교인 도장 아랫부분의 찍는 면(인면) 모습이다. 왕비의 인장임을 표시하는 한자어 ‘內敎(내교)’를 전서체로 새겨넣었다.
출토된 내교인은 손아귀에 쏙 들어가는 ‘미니도장’이다. 어느 왕비의 소장품이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큰 것이 가로·세로 각 4㎝, 높이 5.5㎝, 작은 것은 가로·세로 각 2㎝에 높이 2.9㎝ 정도다. 겉모습을 보면, 앞다리를 펴고 뒷다리는 구부린채 앉은 개 모양의 손잡이를 붙인 게 특징이다. 위로 솟은 꼬리, 목까지 늘어진 귀에 세밀한 선을 조각해 놓았다. 큰 도장의 동물이 정면을, 작은 도장의 동물은 고개를 약간 위로 올려 응시하는 것이 다르다.

두 도장의 아랫 부분 찍는 면(인면)에는 왕비의 인장임을 표시하는 한자어 ‘內敎(내교)’를 전서체로 새겨넣었다. ‘내교(內敎)’란 글자는 <조선왕조실록> 영조 14년(1761년)조에 내전(왕비)이 쓰는 표시라는 등의 기록이 전해져 조선시대 왕비가 사용한 도장임을 알 수 있다.

내교인 도장은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출토품과 비슷한 모양새의 다른 작품 2점이 흑통과 함께 전해져왔다. 학계에서는 내교인을 두고 왕비가 왕실재산의 출납 관리를 승인하는 결재 용도로 썼다고 보고있다. 조선시대 왕실재산을 관리했던 기관인 명례궁에서 다룬 물품의 종류, 지출내용들을 기록한 <명례궁봉하책(明禮宮捧下冊)><명례궁상하책(明禮宮上下冊)>(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을 보면, 본문에 먹으로 찍힌 ‘내교인’이라는 글자가 나와 명례궁의 지출업무에 대한 결재가 왕비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의 국새(국가를 대표하는 도장)와 왕실 인사의 주요 인장들을 정리해 1902년(광무 6년) 무렵 간행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란 문헌도 내교인의 실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자료다. 이 문헌에는 ‘내교인’ ‘소내교인’ 2점에 대한 도설(圖說:그림설명), 크기, 재료 등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통의동에서 출토된 내교인 2과와 조형적 특징이 매우 비슷해 주목된다. 오경택 원장은 “출토된 내교인을 쓴 조선왕비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별도로 문헌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역대 조선 왕실과 궁중에서 먹거리 등의 물품을 출납한 옛 기록들을 뒤져 이 기록들에 찍은 왕비전의 결제도장과 출토된 내교인의 도장이 일치하는 사례를 찾고있는데 워낙 자료가 방대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전했다.

조선왕비의 도장인 내교인이 나온 서울 통의동 70번지 발굴현장. 최근까지 유명삼계탕식당의 주차장으로 쓰였다.
조선왕비의 도장인 내교인이 나온 서울 통의동 70번지 발굴현장. 최근까지 유명삼계탕식당의 주차장으로 쓰였다.
통의동 70번지 유적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18세기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거주했던 사저인 창의궁과 궁중 사람들이 먹는 어류, 육류, 소금 등의 조달을 맡은 관서인 사재감(司宰監)이 있던 곳이다. 구한말과 근대기에는 일제의 동양척식회사 사원사택 등의 민가가 마구 들어서 궁중 시설들이 모두 헐렸고, 발굴 터 상당부분은 최근까지 유명 삼계탕집 주차장으로 쓰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이런 굴곡 많은 역사를 반영하듯 내교인 외에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지어진 건물터 흔적 20여군데와 도자기·기와, 콘크리트 시설물 조각들이 숱하게 발견됐다. 17일 오후 4시30분부터 연구원이 주최하는 현장 설명회가 열린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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