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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눈물로 한강 채웠던 그 땅…문화의 새 살이 돋다

등록 2018-05-07 05:02수정 2018-05-07 09:12

일본군 사령부 뒤이은 미군기지
유곽·집창촌…3류 거리 이미지에
철거민 목숨 앗아간 용산참사까지
험궂은 근대사의 상처 떠안은 곳

‘열린 공간’ 표방한 아모레 신사옥
관객 교감 강조 인터랙티브 전시 등
미술관 열며 문화 플랫폼 본격 가동

인근 중앙박물관·한글박물관부터
조성 예정된 용산역사공원까지
용산역 앞·삼각지 등 문화벨트 기대
역사성 반영한 공공개발은 과제
kimyh@hani.co.kr
kimyh@hani.co.kr
험궂은 땅이다. 근대사의 굴욕이 스쳐 지나간 거리였다.

서울 용산 도심, 정확히 용산역전을 중심으로 삼각지에서 한강대교까지 남북축 도로가 펼쳐지는 한강로 일대는 땅 팔자가 드셌다. 길 언저리는 줄곧 외세의 발굽 아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병영이 차려졌고, 19세기 말 서울 도성 바깥에 외국 교역을 위한 장마당인 개시가 처음 열렸다. 뒤이어 20세기 초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서울에 진공하면서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해 100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군사기지를 닦아 이 시설을 전쟁 뒤 미군이 이어받아 쓰고 있다. 일반 대중에겐 일제강점기 일본군 기지 주변의 유곽과 해방 뒤 형성된 역전 집창촌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2009년 1월 용산 재개발 철거민과 경찰이 망루에서 대치하다 큰불이 나 많은 이들이 숨진 용산참사의 참혹한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숱한 역사적 상처와 특유의 부박한 분위기 탓에 문화 불모지로만 여겨졌던 이곳에 최근 새로운 문화거점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신용산역 앞 한강대로변에 새하얀 정육면체 모양을 한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22층 신사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화장품을 만드는 뷰티기업인 아모레 쪽은 ‘연결’ ‘소통’을 화두로 놓고 사옥을 문화 플랫폼 성격의 랜드마크로 디자인했다. 상가 대신 미술관, 라이브러리 등을 비롯한 다양한 공용 문화시설을 저층부에 채워놓았고, 지난 3일 개관전을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개관으로 미군기지에 가로막혀 도심축에서 고립됐던 이촌동 어귀의 국립중앙박물관·한글박물관과 삼각지 전쟁기념관 사이에 미술관·박물관 벨트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시기는 미정이지만, 미8군 기지가 이전한 터에 거대한 역사문화공원까지 조성되면 지척의 아모레 신사옥을 낀 용산 거리는 서울 강남북을 잇는 거대한 문화 중심축으로 부각될 조짐이다. 부박하고 격 떨어지는 3류 거리로 취급받았던 용산역전과 삼각지 일대의 부도심이 새로운 아트타운으로 부각될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강대로 맞은편에서 바라본 아모레퍼시픽 본사 빌딩의 측면 모습. 건물 왼쪽 진입로 너머의 녹지공간이 현재 미8군 기지(옛 일본군 기지)로, 조만간 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게 될 지역이다.
한강대로 맞은편에서 바라본 아모레퍼시픽 본사 빌딩의 측면 모습. 건물 왼쪽 진입로 너머의 녹지공간이 현재 미8군 기지(옛 일본군 기지)로, 조만간 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게 될 지역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기지 옆 미술관 아모레 신사옥 안팎의 풍경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건물 뒤쪽에 난 정문을 벗어나 옆길로 나가면 전경이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미군 부대 게이트가 바로 보인다. 반면, 건물 지하 미술관에서는 관객 반응에 따라 영상과 조형물이 꿈틀거리며 기기묘묘한 변화를 거듭하는 인터랙티브 예술이 펼쳐지고 있다. 4일부터 시작된 캐나다 작가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개관전 ‘디시전 포레스트’(8월26일까지)의 현장이다. 키네틱 조각, 생체측정 설치작품, 상호반응 우물 등 최첨단 기술로 움직이는 다양한 미디어아트 작업들을 통해 관객의 교감으로 움직이는 현대미술을 구현해 놓았다.

개관전은 실험적이고 난해한 작업이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에 바탕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하겠다는 미술관의 방침을 반영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그룹 창업자 서성환 회장의 공예품, 도자기 컬렉션과 아들 서경배 회장의 고미술, 현대미술 컬렉션이 바탕이 됐다. 1979년 태평양박물관으로 개관한 뒤 200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지만, 본격적인 미술관 활동은 신사옥에서의 재개관이 사실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승창 관장은 “크게는 현대미술 전시를 주축으로 하되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을 적절하게 섞어 선보이는 등 대중형 전시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했다.

건물 1층과 지하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공간에서 개관전으로 선보이고 있는 캐나다 작가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설치물 <블루선>.
건물 1층과 지하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공간에서 개관전으로 선보이고 있는 캐나다 작가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설치물 <블루선>.

신용산 지하철역에서 아모레퍼시픽 본사 빌딩 지하로 들어가는 연결통로. 국내 소장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별무리를 연상케 하는 벽면 작품들을 수놓았다.
신용산 지하철역에서 아모레퍼시픽 본사 빌딩 지하로 들어가는 연결통로. 국내 소장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별무리를 연상케 하는 벽면 작품들을 수놓았다.
영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디자인한 건물 자체도 기업과 지역 사회, 전통과 현대의 소통을 의식하며 디자인했다는 게 그룹 쪽 설명이다. 덩어리감이 큰 육중한 정육면체 매스형 건물이지만, 22층 건물 중앙부 5, 11, 17층에 큰 공간을 틔워 정원을 만들고 건물 세 방향에 이 정원과 연결되는 큰 창을 만들어 주변 공간에 열린 얼개를 만들었다. 특히 바로 인근이 80여만평에 달하는 용산역사문화공원 예정터(미8군 기지)여서, 이를 의식하고 정문을 한강대로변이 아닌 건축물 뒤쪽 공원 예정터와 연결되는 축선에 만든 것이 눈길을 끈다. 정육면체 대형 건물의 육중한 인상을 걷기 위해 달항아리의 백색 이미지를 반영한 차양판 루버를 비가 내리듯 건물 외벽에 미니멀하게 배치한 시각친화적 디자인도 특징이다.

저층 현관 전경. 3층까지 뚫린 개방적 얼개와 원형 인포데스크 설치로 터미널 같은 유동공간을 만들어냈다.
저층 현관 전경. 3층까지 뚫린 개방적 얼개와 원형 인포데스크 설치로 터미널 같은 유동공간을 만들어냈다.

지하 미술관 전시장에 나온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작품 <에어본 뉴스캐스트>. 관객 반응에 따라 영상과 움직임이 나오는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이다.
지하 미술관 전시장에 나온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작품 <에어본 뉴스캐스트>. 관객 반응에 따라 영상과 움직임이 나오는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이다.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대형 인터랙티브 설치작업인 <펄스 인덱스>. 특정 기기에 손가락을 대어 측정한 관객들의 맥박수와 손가락 지문의 영상 등으로 거대 화면을 구성해 보여준다.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대형 인터랙티브 설치작업인 <펄스 인덱스>. 특정 기기에 손가락을 대어 측정한 관객들의 맥박수와 손가락 지문의 영상 등으로 거대 화면을 구성해 보여준다.
용산 한강로의 문화풍경 어떻게 달라질까 새로운 소통 개념을 내세운 아모레퍼시픽 신사옥과 미술관의 등장으로 국내 사립미술관 지형도에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사립미술관의 최대 강자는 삼성미술관 리움이었지만, 지난해 홍라희 관장의 퇴진 뒤 운영이 정체된 상황이다. 세계적인 컬렉터인 서경배 회장의 수집품과 리움 출신 전승창 관장의 기획력이 결합된 아모레 미술관의 전시들은 미술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술관이 자리한 한강로 거리 일대가 어떻게 변모할지에도 시선이 쏠린다. 용산 원도심 거리는 서울에서 문화의 불모지였다. 삼각지에 해방 전후 이발소 그림 공방이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정도다. 먹자골목과 집창촌, 업무용 빌딩이 뒤섞인 조잡한 지역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2005년 이촌역 앞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생기고 미8군 이전 뒤 대규모 공원화 계획이 추진되면서 문화지대로서의 기대감이 조금씩 제기됐던 것도 사실이다. 아모레퍼시픽 빌딩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선이 이어져 도보로 10여분이면 갈 수 있다. 중앙박물관 옆에 한글박물관이 있고,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립한국문학관 이전 등도 추진하고 있어 아트타운으로 활성화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게 미술계의 전망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옥상부 평면 모습. 가운데 부분에 큰 중정을 틔워 생태공간을 만들고 옥상 부분을 태양열 집열판으로 채운 얼개 등이 보인다. 건물 위쪽 큰 도로가 한강대로이고,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남쪽으로 난 도로가 미8군 기지(옛 일본군 기지)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새 빌딩이 배치 구도상 옛 일본군 기지 주변 시가지와 도시가로의 축선을 허물고 지어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옥상부 평면 모습. 가운데 부분에 큰 중정을 틔워 생태공간을 만들고 옥상 부분을 태양열 집열판으로 채운 얼개 등이 보인다. 건물 위쪽 큰 도로가 한강대로이고,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남쪽으로 난 도로가 미8군 기지(옛 일본군 기지)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새 빌딩이 배치 구도상 옛 일본군 기지 주변 시가지와 도시가로의 축선을 허물고 지어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역사성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용산은 조선시대 한강 수운의 물류 요지였고, 일제강점기 일본주둔군사령부가 있었던 대규모 군용지대였다. 문화예술 영역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근대기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핵심 군사기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식민지 무력 경영의 핵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장소성에서 역사적 맥락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셈인데, 아모레 신사옥을 비롯한 용산 일대의 새 건축 공간들이 이런 부분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들이 많다.

사실 신사옥 옆 4차로 길은 일제강점기 내내 건재한 조선군 사령부와 양식의 총독관저로 통하는 100년 넘은 신작로였다. 사옥 뒤 동쪽 가까운 곳에 조선 군사지배의 총본산이 놓여 있었던 셈이다. 도시사학계나 건축사학계 관계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아모레 신사옥과 래미안 센트럴 등 최근 용산역전에 들어선 초고층 건축군이 용산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용산 지역사를 탐구해온 용산문화원의 박천수 연구원은 “신사옥은 용산기지에 가장 가깝고 기지 내부를 가장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공적 건물인데, 건축 과정이나 주변 정비 과정에서 기지에 얽힌 역사성을 의식한 배려들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며 “공원 경계부에 자리한 장소성을 살려 지자체와 함께 표석과 조망공간 조성 등의 역사 흔적 드러내기 작업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주둔 일본군을 지휘했던 용산 사령부 건물. 현재 미8군 부대 안에 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이 건물터와 지척으로, 빌딩 앞길은 조선군사령부로 직통하는 진입로였다.
일제강점기 조선 주둔 일본군을 지휘했던 용산 사령부 건물. 현재 미8군 부대 안에 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이 건물터와 지척으로, 빌딩 앞길은 조선군사령부로 직통하는 진입로였다.
신사옥 옆 미8군 게이트 진입로는 국토교통부가 수년 전 입안한 역사공원화 추진안에서 공원의 정문 진입로로 명시된 바 있다. 공원이 조성될 경우 신사옥은 더욱 많은 인파가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공공적 성격이 더욱 커질 것이다. 사옥 아래 남쪽에는 조선총독부가 1928년 세운 옛 철도병원 건물이 외형을 유지한 채 방치돼 역사문화시설로 전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기도 하다. 박물관·미술관 벨트를 형성했다는 성과에 머물지 말고, 기억하는 이 별로 없는 지역의 과거사를 되새긴 기억경관 살리기에도 그룹과 구청 쪽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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