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추사 김정희>를 펴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명지대 교정의 만개한 이팝나무 아래 서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학교 유홍준 석좌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면 눈이 바삐 움직인다. 벽마다 가득한 서지자료뿐 아니라 담백한 질그릇들과 고서화, 여행 다녀올 때마다 한두개씩 사모은 전통 공예품들이 빼곡하다. 최근엔 난과 대나무 등 사군자화 작품들이 보태졌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편2, 10권)에서 소개한 송은 이병직(1896~1979)의 작품들이다.
“그건 여기 둘 게 아니고 무계원에 보낼 거예요. 얼마 전에 이병직 선생의 작품들이 경매에 나와서 4점을 낙찰받았어요. 송은을 기리는 장소에 송은의 작품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게 아쉬웠던 참이었거든.” 무계원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내시로 미술 애호가이자 서화가였던 이병직의 집 오진암을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가 있던 부암동으로 옮겨 복원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그러면서 소동파의 ‘적벽부’ 중 ‘물각유주’(物各有主: 만물에는 각각의 주인이 있다)를 인용했다. “평범한 물건도 자기 자리를 찾으면 귀해지는 거잖아요. 적어도 이병직 선생 작품 몇점은 오진암으로 가는 게 맞겠다 싶어 종로구에 기증할 생각이에요.” 이렇게 유 교수의 손을 거쳐 귀한 자리를 찾아간 작품들은 제주 추사관을 비롯해 양구 박수근미술관, 국립 추천박물관,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부여문화원 등 전국에 흩어져 있다.
최근 <추사 김정희>를 펴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연구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가장 최근 추가된 연구실 풍경은 문에 붙어 있는 <한겨레> 4월28일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걷는 1면 사진이다. 티브이 앞에서 14시간을 꼬박 앉아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봤던 27일, 그는 두 정상이 회담장에 들어가 처음 나눈 대화를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았다. “김 위원장이 민정기 화가의 <북한산>을 보면서 ‘어떤 기법으로 그린 겁니까?’ 물으니 문 대통령이 ‘서양화인데 우리 동양화 기법으로 그린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걸 보면서 무릎을 치며 감격했어요. 공동발표문 같은 데서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드러나는 대화죠. 이런 자연스러운 대화에서 양국 정상의 문화 마인드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게 미술인으로 큰 감동이었죠.”
정상회담과 함께 남북철도 연결 논의가 시작되면서 유 교수의 마음도 부산해졌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한편의 마지막권으로 남겨두었던 개성-삼수·갑산-백두산 편을 당장이라도 집필하고픈 의욕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또한 만월대 유적 발굴 등 문화재청장 시절 진행했거나 추진했던 북한 문화교류 사업들도 재개가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책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쏟아지는 강연 제안을 대부분 물리치고 5년간 연재해온 <한겨레> 칼럼도 마무리했는데, 정작 앞으로 더 바빠질 듯하다.
“난 인생을 뒤돌아본다거나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강의하고 저술하면서 현재만 살아왔어요. 그런데 지난 1월에 제자들이 칠순이라고 사온 케이크를 보면서 갑자기 뒤를 돌아보게 됐어요. 작가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70세로 장수했다고 썼는데 내가 그 나이가 된 거죠.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어요. 우선 답사기를 어떻게든 종결을 해야 하는데 서울편을 마무리지어야 하고, 국토 전체를 쓰지는 못해도 마지막은 독도로 끝내고 싶어요. 중국편도 써야 하고. <화인열전>도 두세권은 더 써야 하고 <한국미술사> 강의 근현대편도 내야지. 얼추 1년에 한권을 쓴다고 해도 10년이 걸리는 작업인데 못다 하고 죽을 거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 그럼에도 남북 문화교류 사업에 ‘호출’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묵혀뒀던 관련 경험과 아이디어들을 꺼낼 수 있을 거 같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근 <추사 김정희>를 펴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연구실에서 4·27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직접 그린 부채화를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유 교수는 최근 <추사 김정희>를 출간했다. 16년 전 냈던 <완당평전>에서 지적된 오류들을 바로잡으면서도 <완당평전>에서 학술적인 부분을 많이 걷어내고 전기 문학으로서의 완성도에 집중했다. “본래는 <완당평전>의 오류들을 수정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추가해 권수를 늘려 다시 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시간도 부족하고, 학술적 부분은 전문 연구자들이 더 잘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전기로 쓰자고 마음을 바꿔먹게 됐죠.” 인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에게 전기 작업은 더 편하면서도 특별했다. “우리 인문학이 대중과 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전기 문학 전통의 상실이라고 봐요. 외국은 임어당의 소동파, 이. 에이치.(E. H.) 카의 도스토옙스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같은 불멸의 전기 문학들이 있는데, 우리는 다산·이순신·세종대왕 등 중요 인물의 전기가 아동문고에서 끝나버리잖아요.”
“안 믿겠다는 사람을 끌고 와 믿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자신을 문화유산 교사나 안내자가 아닌 “전도사”로 지칭하는 유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5년 세월의 결실을 어떻게 평가할까. “동네 목욕탕을 가다가 미용실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어요. 평소 속눈썹 펌 25% 할인, 이런 문구를 적어놓던 곳인데,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최고의 미용실!’이라고 적혀 있습디다. 3권 몽촌토성 답사 때부터 썼던 말인데 이 정도면 전도가 아주 잘된 거죠.”(웃음) 미용실의 우아하고 재치있는 이 입간판 사진은 9권 서울편에 담겼다. 김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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