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카미유 클로델이 로댕을 처음 만난 19살 당시의 사진. 위키피디아
유난히 청춘의 얼굴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이 그렇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미친 조각가’라고? 맨 처음 카미유의 사진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가장 유명한 모습이기도 한 그의 19살 얼굴에는 잊기 힘든 아름다움이 담겼다. 우수에 젖은 커다란 눈망울, 오뚝한 콧날과 섬세한 얼굴선은 영화 <까미유 끌로델>(1988)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한 프랑스 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외모가 결코 그를 ‘미화’시킨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자연을 거부한 혁명, 여성 천재.” 1903년 프랑스 작가 살롱에 출품한 그의 작품에 쏟아진 찬사다. 그는 거장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연인이자 제자, 뮤즈이기 이전에 천재였다. 카미유 클로델은 13살부터 일찌감치 조각에 흥미를 보였다. 늦은 나이에 딸을 얻은 아버지는 카미유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수업을 받게 하는 등 딸을 무척 아꼈다.
반면, 어머니와는 삶을 마감할 때까지 불화했다. 그의 강한 성격을 보여주는 유명한 에피소드. 어린 카미유가 20㎏이 넘는 진흙을 집으로 들여오려다 반대에 부딪혔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이를 버리려 하자 그녀는 고집을 피웠고, 결국 어머니가 여러 차례 뺨을 때렸음에도 끝까지 진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어쩌면 로댕과의 불같은 사랑도 이런 카미유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883년 처음 로댕을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살이었다. 로댕은 이미 43살의 중년이었고 20여년을 함께 살아온 실질적 아내가 있는 상태였다. 24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 연인으로 발전한다.
“생기가 사라졌던 나라는 존재가 기쁨의 불꽃을 피우며 타올랐다. 그것은 다만 너로 인해서였다”는 로댕의 고백처럼 그들은 연인으로서뿐 아니라 예술가로서 각자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카미유는 로댕 작업실의 유일한 여제자로 일하면서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입맞춤> 등 로댕의 대표작들을 함께 작업하게 되고, 이 시기에 카미유도 <사쿤탈라> <로댕의 흉상>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정열적인 ‘입맞춤’이 카미유에게는 또 다른 ‘지옥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카미유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그만의 독창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작가로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로댕과의 관계는 소원해져 갔다. 10여년을 함께 창작에 몰두했지만 카미유의 이름으로 남은 작품은 얼마 없었다. 1898년, 살롱전에 출품했던 카미유의 작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들은 완전히 결별한다. 이때부터 카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작품을 훔치려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된다.
더한 비극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1913년 카미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다. 이후 카미유는 79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무려 30여년간을 그곳에서 갇혀 지내게 된다. 로댕에 대한 편집증 외에 딱히 ‘미쳤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난해 로댕 타계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노장쉬르센에 카미유 클로델을 기리는 국립미술관이 문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간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했던 카미유의 추종자 외젠 블로의 예언처럼, 로댕에 가려졌던 그녀의 열정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김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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