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종류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앞에 두고 글렌케런 잔으로 시음중인 남성의 모습. 박미향 기자.
술자리를 파하고, 일행들이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할 때면 위스키 꾼들은 마지막 한 잔을 찾아 가까운 위스키 바를 찾는다.
그날 기분에 따라 주종도 연산도 마시는 법도 다르다.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고 싶은 날엔 글렌케런 잔(‘노징 글라스’라고도 불리는 시음용 잔)에 균형이 잘 잡힌 ‘발베니 더블우드 17년’을 담아 하루를 마무리한다. 요즘처럼 갑자기 무더워졌을 땐 갯내음이 강한 ‘라프로익’에 무가당 탄산수를 섞어 하이볼(위스키로 만든 칵테일의 종류)로 마신다. 특별히 “오늘은 라임이나 허브는 넣지 말아 주세요”라고 폼을 잡으며 주문하는 날도 있다. 그러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위스키 박사님들이 이렇게 저렇게 추천하는 최선의 음용법이 있지만, 항상 최선을 추구하진 않는다. 다들 나름의 노하우로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마지막 한 잔을 즐긴다. 그런데, 가끔 마지막 한 잔으로 꼭 마시고 싶었던 위스키가 단골 바에 없는 날이 있다. 최근에는 ‘라가불린’이다. 라가불린 16년산의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몇몇 위스키 바에서 이 술을 못 마시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3년 12월 미국 뉴욕의 한 주류 판매점에 진열된 ‘밴 윙클’ 위스키 라인업. 사진 EPA 연합뉴스
이는 몇몇 위스키들이 갑자기 명성을 얻어 벌어진 품귀 현상과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일본 닛카 증류소의 ‘다케쓰루 17년산’의 경우 한때 위스키 바에 한 병 들어왔다고 소문이 나면 굶주린 술꾼들이 제발 한 방울만 달라고 쫓아가 아우성을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4~2015년 월드위스키어워드에서 연속으로 최고상을 받으며 갑작스레 유명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유명세 때문에 범죄자들의 타깃이 될 만큼 희귀해진 버번 위스키도 있었다. 한 해에 고작 7000여 케이스(케이스당 3병)만 출하하는 ‘패피 반 윙클’이 그 주인공이다. 미슐랭 별 두 개짜리 레스토랑의 셰프인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장 등이 2012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에서 ‘최고의 버번 위스키’라 칭송하고 나서는 바람에 안 그래도 구하기 힘들었던 이 위스키는 돈이 많아도 구할 수 없는 전설로 남았다. 이런 이유로 이 술을 증류하는 버펄로 트레이스 증류소에서 누군가가 195병을 훔쳐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이 술 한 병의 희망 소매가는 약 130~140달러 정도. 증류소 쪽의 명목 피해액은 총 2만 6000달러(약 2800만원) 정도였지만, 아직도 잡히지 않은 그 도둑이 이를 판다면 병당 2000달러(약 210만원)는 충분히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라가불린’은 어떻게 다를까? 일단 라가불린은 최근에 ‘다케쓰루 17년산’이나 ‘패피 반 윙클’과 같은 갑작스런 명성을 얻은 적이 없다. ‘라프로익’, ‘아드벡’과 함께 ‘아일레이 3총사’, ‘피트 3형제’로 불리는 이 위스키는 원래 유명하기 때문에 갑작스레 더 유명해질 일이 없다. 갑자기 팬이 늘어나
서라고만 보기는 애매하다. 폭발적 인기를 얻을 대중적인 맛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일레이섬의 위스키는 피트의 연기로 훈증해 몰트를 말리는데, 그 과정에서 훈연향과 강한 갯내음이 밴다. 애호가들은 이 특유의 향취에 환장을 하지만, 처음 맡은 사람들은 ‘병원 냄새’내지는 ‘소독약 냄새’라며 싫어한다. 심지어 “지인들에게 라가불린을 추천했다가 싸웠다”는 일도 허다하다.
이번 라가불린 위스키의 일시 품귀는 연산 위스키의 숙명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매년 시장에 풀리는 양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이다. 라가불린의 수입사인 디아지오코리아 쪽은 <한겨레>에 “올해 풀 수 있는 물량은 이미 다 풀었다. 기본적으로 연산이 적힌 모든 위스키는 한정 생산품이라 한 해에 한국 시장에 풀도록 정해진 물량이 있다. 대략 3000병 정도인데, 이게 벌써 동이 난 것”이라고 밝혔다. 좀 더 찾아보면 라가불린 16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역시 아일레이 지역 위스키인 라프로익 쿼터캐스크 역시 시장에서 정식 경로로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돈다.
옆 나라 일본에서는 비교적 대중적인 위스키가 품귀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아사히신문> 디지털 판의 보도를 보면, 산토리 주류 쪽이 최근 하이볼의 바람을 타고 소비가 급증한 ‘히비키 17년’과 ‘하쿠슈 12년’의 판매가 중단을 예고하면서 옥션 시장에서 그 값이 치솟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위스키를 꾸준히 마신다는 건 이렇게나 힘든 일이다.
<싱글몰트 위스키 바이블>의 저자인 유성운 씨는 “일반적으로 위스키는 숙성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번 동나면 꽤 오랜 시간 구하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12년산이라고 하면 12년산보다 더 오래된 원액만을 섞어 만든다. 해당 위스키를 만드는 최소 기간이 12년이라는 얘기”라며 “이런 이유로 몇몇 위스키들은 아예 연산을 지우는 ‘논 에이지 스테이트먼트’(NAS)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위스키 브랜드들이 10년산 12년산 등으로 표기하지 않고 ‘셀렉트 캐스크’, ‘에디션 넘버 원’, ‘블루 에디션’ 등으로 출시하는 이유는 원주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씨는 이어 “그러나 이번 라가불린 품귀는 마을버스가 조금 늦게 오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내년에 라가불린 16년산으로 출하될 원주가 이미 15년 전부터 참나무통에서 충분히 숙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어 내년에는 내년 치의 라가불린 16년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한번 마시면 다시는 구할 수 없는 와인의 특정 빈티지(와인을
병입한 해)처럼
마을버스의 노선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밝혔다.
남성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루엘>의 피처 디렉터 강보라씨는 “갑작스런 수급 불균형은 위스키 애호가에겐 전시상황이나 다름없다. 하우스 와인처럼 즐겨 마시는 나만의 ‘하우스 위스키’가 있다면 생필품 챙기듯 집에 두어병 쟁여놓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라고 밝혔다. 술꾼을 위한 위기관리의 말이다.
박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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