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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작가 사후 며느리가 찾아낸 국내 최고 유화

등록 2018-06-03 16:50수정 2018-06-03 20:37

-작품의 운명 ② 고희동의 ‘자화상’-

1915년 일본 유학서 돌아와 그린
국내 첫 서양화가의 가장 오래된 작품
웃통 풀어헤치고 앉은 파격적 구도

작가 생전 “남은 유화 없다”했지만
작고 7년 뒤 이삿짐 꾸러미서 발견
고희동이 일본 도쿄미술학교 졸업 직후 귀국해 그린 <자화상>(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현재 국내 근대 작가의 작품으로 국내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근대 유화다. 빛이 측면에서 비치는 외광파(인상파) 화풍으로 꼼꼼하게 그려졌다. 웃통을 풀어헤치고 자기 몸을 드러낸 파격적 구도를 통해 당대 근대화단의 선구자였던 작가의 자의식을 읽을 수 있다.
고희동이 일본 도쿄미술학교 졸업 직후 귀국해 그린 <자화상>(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현재 국내 근대 작가의 작품으로 국내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근대 유화다. 빛이 측면에서 비치는 외광파(인상파) 화풍으로 꼼꼼하게 그려졌다. 웃통을 풀어헤치고 자기 몸을 드러낸 파격적 구도를 통해 당대 근대화단의 선구자였던 작가의 자의식을 읽을 수 있다.
“고희동! 그림의 인물을 보자 한눈에 직감했어요. 국내 최초의 근대 양화가이자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죠. 생전 취재한 적도 있어 얼굴이 친숙했거든요.”

1972년 8월 여름날이었다. 당시 서울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던 40살의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이구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관장실 앞에 낯선 그림 2점이 놓여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7년 전 작고한 근대화가 고희동(1886~1965)의 얼굴이 비쳤던 것이다.

“관장이 군 출신 장상규씨였어요. 바깥 그림이 뭐냐고 물으니, 고희동씨 며느리가 둘둘 만 채로 들고 와 구입해달라고 놓고 갔다는 거예요. 대뜸 ‘반드시 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요.”

원로 미술사가 이구열(86)씨의 회고대로, 고희동이 1915년과 1918년 잇따라 그린 두 점의 <자화상>은 그의 예리한 눈매 덕분에 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1915년 작 <자화상>은 국내에 남아 있는 국내 작가의 가장 오래된 근대 양화이자 등록문화재다. 단박에 작품들 가치를 알아본 기자의 당부를 관장은 귀담아들었고, 곧장 구매에 나서 15년작은 20만원, 18년작은 10만원에 사들였다. 학예사 한명 없고 예산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지만, 운좋게도 그해 1500만원의 작품예산을 확보한 터라 구입은 순조로웠다.

고희동은 중인 역관 가문 출신이다. 법어학교(불어학교)를 다니다 미술에 심취한 프랑스 교사의 영향으로 1909년 국내 최초의 일본 도쿄미술학교 입학생이 된다. 졸업 때까지 그는 일본 화단에 유행하던 프랑스 인상파 영향을 받은 외광파 화풍과 해부학 등을 익혔다. 1915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수송동 자택에서 그렸다는 <자화상>은 이런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그림은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웃통을 풀어헤치고 앉은 화가가 부채를 든 모습이다. 빛을 받는 배경과 인물의 몸, 얼굴이 각기 다른 음영과 채색, 정확한 선묘를 통해 묘사돼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외광파 화풍을 드러낸다. 전시회 기록이 없어 그린 뒤 내보이지 않고 홀로 보관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그린 고희동의 자화상. 1915년 작과 용모나 화풍상의 차이는 별로 없으나 인물이 바라보는 방향이 거꾸로 돼 있다.
1918년 그린 고희동의 자화상. 1915년 작과 용모나 화풍상의 차이는 별로 없으나 인물이 바라보는 방향이 거꾸로 돼 있다.
1915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 고희동이 그린 자화상들 가운데 가장 시기가 이른 작품이다. 현재 도쿄미술학교의 후신인 도쿄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15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 고희동이 그린 자화상들 가운데 가장 시기가 이른 작품이다. 현재 도쿄미술학교의 후신인 도쿄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이 입수된 때는 당시 문화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1972년 6~7월)이 막 끝난 직후였다. 애초 전시 제목의 기념 연도는 국내 최초 양화가 고희동의 활동 시작 시기를 참고해 60년으로 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유화는 당시까지 한 점도 전해지지 않았다. 작가도 생전 “남은 유화는 없다”고 단언해 아쉬움 속에 전시를 치러야 했다. 뜻밖에도 그 소문을 들은 고희동의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40년대 원서동 자택으로 이사하며 쌌던 옛짐들을 뒤지다 두 점의 유화를 발견해 미술관에 전하게 된다. 여기서도 방치될 뻔하다 결국 기자의 눈에 띄어 수장품으로 들어왔으니 한국 근대미술사의 기적 같은 행운이라고 할 만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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