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학계가 일본에서 소재를 확인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전신상. 보관을 쓰고 자비롭고 인자한 표정을 지은 머리 부분과 천의를 두르고 영락 등의 장식을 걸친 상하반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한국 불교미술의 최고 걸작이다. 문화유산회복재단 제공
가장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를 찾았다. 한국 미술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혔으나 1907년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뒤 일본에 반출돼 90여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소재가 최근 일본에서 확인됐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이사장 이상근)은 이 관음상을 소장해온 일본의 한 기업인이 지난해 12월 도쿄를 방문한 한국미술사학회의 최응천(동국대), 정은우(동아대) 교수에게 불상을 공개했으며 두 교수는 이 관음상이 진품임을 공식 확인했다고 3일 <한겨레>에 밝혔다.
7세기 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높이 28cm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왼손에 보병을 든 관음보살이 당당하게 서있는 자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인자한 미소를 띤 표정, 어깨·허리 등을 살짝 비튼 자세, 천의를 두르고 구슬장식(영락)을 걸친 모습 등이 완벽한 조화와 미감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국보 78호·83호 반가사유상,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맞먹는 명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 농부가 발견한 이 불상은 1922년 일본인 이치다 지로에게 팔려 해방 직후 그가 일본에 갖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재단 쪽은 “70년대 이치다한테서 불상을 사들인 현 소장자를 3년 전 찾아내 협의한 끝에 지난 연말 동의를 얻어 공개하게 됐다”며 “소장자는 불상이 귀환했으면 좋겠다는 뜻도 내비쳤다”고 전했다. 불교미술사가인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는 “반드시 돌아와야 할 한국 미술의 대표작이다. 정부와 학계가 환수를 위해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잊을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미소였어요. 우리나라에서 장인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얼굴과 몸매가 아닐까요. 지금도 눈앞에 자태가 어른거립니다.”
지난해말 일본 도쿄에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을 실견한 정은우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불상을 실측조사한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도 “백제 조각 최전성기의 부드럽고 날렵한 조형 감각이 여실히 드러난 명작”이라며 미술사 연구에 새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했다.
■ 최고의 완성도와 조형미
정은우 교수는 불상을 실견한 뒤 쓴 의견서에서 “백제 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이라고 단언했다. 이른바 ‘백제의 미소’가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라는 말이다. 보관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위로 틀어 올렸고, 부드럽게 늘어진 천의, 다리에 힘을 빼고 목과 허리 등을 살짝 뒤튼 삼곡 자세가 돋보이며,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얼굴 표정과 우아함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준다는게 그의 분석이다.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리에서 함께 발견된 국보 293호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높이 21.1cm). 원래 일본인 소장품이었으나 해방 뒤 압수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미스 백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에 소장된 금동관음상과 달리 대좌(받침대)가 붙어있다.
학계에선 오랫동안 이 관음상의 소재를 찾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 불상은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리 들판에서 한 농부가 발견한 두 점의 금동관음보살입상들 가운데 하나다. 모두 일본 헌병대에 압수됐다가 경매를 통해 일본인 수집가들 손으로 넘어갔다. 이중 하나는 해방 뒤 압수절차를 거쳐 국보 293호로 지정됐고, 세간에 ‘미스 백제’란 별명으로 불리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또다른 불상은 1922년 일본인 의사 이치다 지로가 사들여 소장하다 해방 뒤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얘기만 전해져왔다. 1930년대 이후로는 전시 등에 나오지 않아 흑백사진 몇장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뒷모습. 다른 삼국시대 불상들은 뒤태가 대개 평면적이거나 거칠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불상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옷주름 음영이나 몸체의 굴곡까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특히 하반신 옷주름은 국보 83호 금동반가상의 옷주름과 빼어닮아 학계의 오랜 논란거리인 국보 83호의 국적 문제를 푸는데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백제 불상은 7세기에 이르러 북제·수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다소 덩어리감이 크고 투박한 느낌을 보여주던 6세기 양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자세, 우아한 장식 등을 표현하는 단계로 도약하게 된다. 이번에 공개된 관음상은 그 시기의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한반도 불상은 약 150여구 정도로, 이들 가운데 국적 및 출토지, 이전 경위, 소장내력이 정확하게 알려진 불상은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유일하다.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는 “옛 흑백사진과 일치하는 완벽한 진품으로, 도금된 상태나 불상의 표면 등이 잘 남아있어 다행이다. 누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 이 불상의 지금 모습을 생전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기뻐했다.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상반신 모습. 가슴부분 띠장식에서 보이는 구름무늬, 당초무늬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의 뚜껑과 받침대 사이에 있는 무늬와 똑같다. 같은 장인이나 그가 일했던 공방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화유산회복재단 제공
■ 백제대향로와 반가사유상과도 깊은 관계
최근 학자들이 확인한 이 금동관음상의 세부들을 보면, 기존 백제 불상과는 다른 독특한 요소들이 많다. 최응천 교수는 불상 앞 가슴 부분의 옷에 두른 띠장식에서 구름(운문) 혹은 당초무늬가 연속해서 나타난 부분들이 보이는데, 이런 무늬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과 받침대 사이에 있는 장식무늬와 똑같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도상이 너무 똑같아 놀랐다. 백제 왕실의 최고 장인이나 이 장인이 꾸린 공방이 백제대향로와 금동관음보살입상을 같이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불상 뒷면의 경우 다른 삼국시대 불상들은 대개 평면적이거나 거칠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불상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뒤태의 옷주름 음영이나 몸체의 굴곡까지 세공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하반신의 옷주름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의 옷주름과 빼어닮은 특징을 보여, 학계에서 논란거리로 남아있는 국보 83호의 국적 문제를 푸는데도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1932년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펴낸 <조선미술사>에 실린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옛 흑백사진. 지난해 12월 불상 실물이 일본 도쿄에서 공개되기 전까지 학계에 알려졌던 몇안되는 사진들중 하나다.
■ 어떻게 환수할 것인가
불상을 일본에 가져간 이치다 지로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의원을 열었던 의사로, 수백여점의 조선 고미술품들을 소장했던 굴지의 컬렉터였다. 이 작품의 입수·반출경로를 추적해온 이한상 대전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치다는 1929년 대구에서 열린 신라예술품전람회에 이 불상을 포함한 소장품들을 선보인 것을 마지막으로, 1970년대 그가 죽을 때까지 백제관음상을 극소수의 지인 말고는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후손들에게도 “이 작품은 절대로 바깥에 공개하면 안된다”는 유지를 남겼고, 기업가로 알려진 현재 소장자도 70년대 이치다로부터 작품을 넘겨받을 당시 이런 유지를 전해듣고 계속 지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의 이상근 이사장은 “이치다 지로가 불상을 소장하고 있을 당시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소장 사실을 알고 거액에 팔라고 흥정을 붙였으나 고인이 거절한 것으로 들었다. 이번에 소장자가 고심 끝에 한국 학계에 공개한 만큼 불상이 돌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단에 관여하는 국회의원들, 불상 출토지인 충남도 등과 논의해 불상의 고국 귀환을 위한 협의체를 꾸릴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불상의 왼손 부분. 천의를 손목에 휘감은 채 주둥이가 구부러진 정병을 들고있다. 구름무늬 새겨진 가슴부분의 띠장식도 보인다.
관건은 환수 재원 마련 등의 구체적인 청사진이다. 백제금동관음상의 가치는 국보 금동반가사유상과 백제금동대향로의 전시 보험가액인 300억~500억원대에 필적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문화재청이나 박물관 등 특정한 기관만이 추진하기에는 버거운 과제다. 범정부 차원의 환수 계획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진품으로만 공인되면, 수백조원 예산을 쓰는 나라에서 수백억원대 특별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