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자동차로 5시간 달려 도착한 녹동항(전남 고흥군 도양읍) .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푸른 섬, 소록도가 떠 있었다. 일제의 한센인 강제수용이 시작된 이래 섬과 뭍의 심리적 거리는 한없이 멀었을 테지만, 2008년 소록대교 개통으로 뱃길이 육로로 변하면서 이젠 5분 거리로 좁혀졌다.
2012년부터 소록도 마을을 기록·보존하는 작업을 해온 건축가 조성룡과 조경가 박승진, 김경완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연구실장과 함께 지난달 31일 소록대교를 건넜다. 이들이 지난해 8월 ‘복원’을 마친 서생리 마을( <한겨레> 2017년 11월11일치 15면)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섬에 들어서자 곳곳을 뒤덮은 멀구슬나무 꽃향기가 진동했다. 초여름 태양의 열기로 부풀어오르는 바다와 측백·삼나무 등 울창한 침엽수 숲이 손님들을 맞았다. 주차장에서 국립소록도병원까지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은 환자 부모들과 이들의 미감아 자녀들이 한달에 한번씩 면회하던 곳이다. 맑은 바닷바람도 씻어내지 못한 애달픔은 수탄장(愁嘆場·탄식의 장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병원이 있는 중앙리를 지나 서쪽 병사지대 마을로 들어서니 소형 전동차를 타고 다니는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상과 격리됐던 주민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 이젠 5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한때 10개였던 마을도 이제 7곳에서만 사람이 살고 있다. 이중 조성룡이 작업한 서생리는 소록도 첫 병원인 자혜의원(1916년)이 들어서며 생겨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으로부터 서생리 ‘복원 작업’을 위탁받은 조성룡은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식구들과 함께 식물 덩굴 속에 파묻혀 있던 집들을 ‘발굴’했다. 1920~1970년대 지어진 이 집들은 부엌이 붙어 있는 방(대략 가로 3m, 세로 3m) 네 칸을 잇따라 붙이고 한켠에 화장실을 둔 구조다. 한 방엔 4~5명씩, 집 한 채에 16~20명이 사는 집합주택인데, 워낙 비좁아 주택이라기보다는 수용소에 가까웠다. 지붕이 뚫리고 보가 주저앉고 벽이 금 간,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서 조성룡은 ‘소멸’과 ‘기억’이라는 건축 본연의 운명과 근본적 의미를 골똘히 생각했다. 제대로 된 장비 없이 뭉개진 손가락으로 벽돌을 굽고 자재를 날라 집을 지은 한센인들의 노고도 떠올랐다. 당장 이 마을을 어떻게 ‘복원’해야 하는지,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또렷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선 ‘소멸의 유예’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생리 마을 중심부에 있는 집 8채를 골라 환자를 부축하듯 철제 비계로 무너져가는 건물을 지탱하도록 했다. 최대한 가볍고 간소한 자재로 지붕을 메꿨다. 솎아서 베어낸 나무로 계단을 만들고 집들 사이로 작은 길을 이었다. 공간을 쓸모있게 바꾸는 보수도, 원형으로 되돌리는 복원도, 방부 처리를 하는 보존도 아닌, ‘건축을 통한 기억’이라는 낯선 방식이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 서생리에 있는 유일한 2층 집. 섬 주민들은 이곳이 한때 간이 진료실, 매점 등으로 쓰였다고 기억한다.
5월31일 찾은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서생리 마을. 건축가 조성룡은 지난해 이 마을의 집들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제 비계로 구조물을 지탱하는 보강 공사를 진행했다.
‘서생리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축가 조성룡(왼쪽부터), 조경가 박승진, 김경완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연구실장.
박형철 국립소록도병원 원장은 “그동안 주민들의 흔적을 어떻게 남길 것인지 전혀 갈피를 못잡고 있었는데, 서생리 프로젝트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줬다. 이 모델을 바탕으로 좀더 많은 논의를 통해 소록도 역사를 기념하는 방식을 결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록도 100주년 기념시설물’ 앞을 건축가 조성룡(왼쪽)과 김경완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연구실장이 지나가고 있다. 한센인 환자들이 살던 집을 개조한 기념시설물 창엔 시인 한하운의 ‘어머니’가 적혀 있다.
조성룡의 신중한 태도는 ‘소록도 100주년 기념시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젠 주차장으로 변한 장안리에 남아있는 병사(病舍) 한 채를 방문객들의 쉼터이자 작은 기념관으로 바꾼 것이다. 환자들이 살던 방 네 칸을 훼손 정도에 따라 저마다 달리 손질했다. 그나마 보존이 잘된 곳은 원형 가까이 되살리고, 아예 지붕이 없는 곳은 그대로 하늘을 향하게 했다. 유리창을 갈아끼우는 대신 기존 창틀 위에 유리를 그대로 덮어 훼손을 막았다. 소록도에 살던 환자(노석)가 각 마을의 특성을 노래한 ‘갱생 소요가’가 기념관의 창에 씌어 있다. “장안리 백사청송 바람아 부지마라/하마 하면 내 마음 너에게 부칠 소냐/저 건너 득량만을 눈아래 굽어보니/고향에 남긴 옛정 이제금 살아나네.”
소록도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위패 400여기가 모셔져 있는 언덕 위 만령당. 정부는 이 일대에 추모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소록도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70대 중반이다. 정부는 앞으로 30년쯤 지나면 한센인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성룡은 “소록도 수난사가 마침표를 찍으려는 틈을 타고, 개발의 욕망이 곧 이곳을 덮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며 “소록도의 슬픈 역사가 근사한 멜로 서사처럼 둔갑해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한센인들의 모임인 ‘국립소록도병원 원생자치회’ 관계자도 “우리들이 이 섬에서 살아온 고통스러운 역사를 후세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광지처럼 개발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록도/글·사진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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