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복진이 1935년 만든 미륵불상.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통일신라 시대 이래의 불상 조각전통과 근대적 기법이 어우러진 수작이다. 실물로 전하는 김복진의 몇안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앞두고 충남 계룡산 소림원에 소장된 작가의 석고불상을 직접 떠서 청동상을 만든 뒤 소장하게 된 독특한 내력을 갖고있다.
‘근대 조각 선구자 김복진 작품 발견’
1994년 12월27일치 <한겨레>에는 이런 제목의 단독기사가 실렸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당시 경원대(현 가천대) 교수가 충남 계룡산 기슭의 절인 소림원 법당에서 국내 근대 조각, 소조 분야의 비조로 꼽히는 김복진(1901~1940)의 1936년작 미륵불상을 확인해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에 발표했다는 내용이었다.
높이 1m를 조금 넘는 이 불상은 해방 전부터 봉안해온 것이었다. 통일신라 불상 같은 당당한 체구와 용모에 옷주름의 흘러내림이 정교하게 조각된 수작. 근대 재료인 석고로 만들어졌고 김제 금산사에 미륵대불의 ‘축소생(축소모형)’으로 있던 것을 전임 주지가 가져왔다는 주지스님 증언까지 확보돼 김복진 작으로 단정할 수 있었다. 1936년 금산사 미륵대불을 만들기 위한 사전 모형(마케트) 성격의 제작품임이 판명된 것이다.
김복진은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나와 1924년 일본 제국미전에 처음 입선한 뒤 10여년간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수차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특선, 입선을 차지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 중앙위원으로 사회주의 예술운동을 벌였다. 국내 처음 근대적 기법과 재료로 조각과 소조 작품들을 창작했을 뿐 아니라 카프의 주역으로 숱한 문예평론을 발표한 좌파 이론가였다. 한국 진보미술의 아버지라 할 만한 인물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동생 김기진의 인쇄공장에 있던 주요 작품들이 모두 불타 유작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림원 미륵불의 발견은 고인의 작풍을 실감할 수 있는 반가운 사건이었던 셈이다.
사회주의자였지만, 김복진은 도쿄 유학시절 불교에 귀의했다. 카프 조직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막 출옥한 시점 창작한 작품이 소림원 불상과 금산사 미륵대불이란 사실은 그가 전통에 바탕한 근대조각의 지평을 고민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김복진은 1939년 시멘트 재료를 써서 충북 보은 법주사 미륵대불 제작에 착수하지만, 일부만 만들고 1년여만에 요절하고 만다.
윤 교수가 찾은 소림원 미륵불의 인연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로 이어진다. 1999년 ‘근대를 보는 눈-조각 소조편’을 기획한 정준모 당시 학예실장은 소림원 주지를 찾아가 불상 대여를 요청했다. 하지만, 신앙대상인 불상을 반출할 경우 수천만원이 드는 복잡한 예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뜻을 접어야 했다. 김복진의 몇 안되는 실물을 꼭 전시하고 싶었던 그는 묘수를 냈다. 불상 자체를 실리콘 거푸집으로 떠서 따로 청동제 불상을 만들기로 한 것. 사정사정해 주지의 허락을 받은 뒤 미술계 후배였던 차기율, 임승오, 최수현 작가를 데리고 절 근처 여관에서 1주일간 숙식하면서 불상의 실리콘 모형을 뜨고, 주물을 부어 청동불상 2개를 제작했다. 1개는 절에 주고, 다른 1개를 미술관으로 가져왔다. 지금 덕수궁관 전시에 나온 김복진의 청동미륵불은 19년전 이런 곡절을 거쳐 소장품이 되었다. 지금도 기획자로 활동중인 정준모씨는 “청동불 제작비용은 지인에게 우선 주는 조건으로 빌려 조달했고, 나중에 미술관이 지인한테 사들이는 형식으로 구입했다”며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김복진 작품으론 유일 소장품이 됐다는 보람도 컸다”고 털어놓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