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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일본서 되찾은 천재화가의 꽃그림…비극적 후일담에 더 애틋

등록 2018-07-10 05:00수정 2018-07-10 10:17

작품의 운명 ⑥ 이인성의 ‘카이유’

1930년대 일 왕실 매각 뒤 행방 묘연하다
20여년 전 소장자 나타나 1999년 재전시
작가의 아들 거쳐 미술관 소장품 등록
‘쾌유’란 꽃말과 다르게 화가 등 요절
일제강점기 조선화단에서 천재로 불렸던 이인성의 1932년작 수채화 <카이유>. 칼라꽃을 그린 정물화다. 유화를 방불케하는 묘사의 밀도감과 색채감이 인상적이다.
일제강점기 조선화단에서 천재로 불렸던 이인성의 1932년작 수채화 <카이유>. 칼라꽃을 그린 정물화다. 유화를 방불케하는 묘사의 밀도감과 색채감이 인상적이다.
화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분위기가 감도는 꽃그림이다. 일제강점기 천재화가로 이름높았던 청정 이인성(1912~1950)이 1932년 그린 수채화 <카이유>는 되새김하며 보는 감상의 맛이 남다른 작품이다. 길쭉한 화병에 보랏빛, 흰빛, 오렌지빛을 머금은 백합과의 칼라 꽃이 만발한 이 정물화는 여러 색채가 갈마드는 배경 화면과 꽃들이 정연한 구도 아래 어울린다. 단아한 미감을 자아내지만, 꽃잎과 화병 주위에 보랏빛(퍼플 블루)의 색감이 부각되면서 내면의 우울한 정서도 드러내고 있다.

화실에서 작업중인 청년시절의 이인성.
화실에서 작업중인 청년시절의 이인성.
1929~30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연속 입선해 일찍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던 이인성은 31년 마침내 특선을 수상하며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된다. <카이유>는 32년 도쿄의 크레용 상회에서 일하며 태평양미술학교를 고학하던 시절 현지에서 그려 선전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역시 특선을 차지하며 조선화단을 놀라게 했다. 수채화인데도 유화를 방불케하는 짙고 다양한 색감의 정물화를 처음 시도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림 뒷면엔 작가의 친필로 일본 현지 주소와 작품 제목이 정갈하게 씌어있다.

작가의 작품 이력에서 후반부 표현주의적 회화로 가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당시 이례적으로 일본 왕실 궁내청이 구입했다. 그뒤 종적이 묘연해져 선전도록의 흑백도판으로만 전해져왔다. 그러다 20년 전 우연히 재발견되면서 여러 곡절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되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카이유>가 특선한 뒤 받은 특선장. 당시 청년 이인성의 얼굴사진이 들어가있다. 이인성의 아들 이채원씨 소장품이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카이유>가 특선한 뒤 받은 특선장. 당시 청년 이인성의 얼굴사진이 들어가있다. 이인성의 아들 이채원씨 소장품이다.
일본 왕실은 이 작품을 산 뒤 일왕의 승마교사에게 선물해 그의 후손이 계속 소장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소장자가 직접 미술관 도서실을 찾아갔다. 그는 직원에게 작품사진과 자료를 건네주면서 판매 의사를 타진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미술관의 고 김희대 학예사(1958~1999)와 정준모 당시 학예실장은 사비를 들여 일본 소장처까지 다녀오면서 작품을 확인했으나 그때는 학예실에 구입 권한이 없었고, 구입 심의 절차도 까다로워 당장 사들일 수 없었다. 둘은 이인성 작가의 아들로 고인의 기념사업을 추진중이던 이채원씨에게 미술관 대신 작품을 사달라고 간청했고, 이를 수락한 이씨가 수차례 일본을 오가며 협상한 끝에 1억원대의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카이유>는 그뒤 1999년 11월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한국미술 50년’전에 선전 출품 67년만에 처음 재전시되면서 미술계의 눈길을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때 대기업 매각설이 나와 미술관 쪽을 긴장시켰지만, 당시 간암 투병중이던 고 김희대 학예사가 이채원씨에게 “이 작품만은 꼭 미술관에 와야한다”고 당부한 끝에 1999년말 미술관이 다시 사들였다.

작품 제목 ‘카이유’는 칼라꽃의 일본어 제목으로 알려져왔으나, 실제 일본말로는 ‘카라’라고 발음하므로 칼라꽃의 꽃말인 ‘쾌유, 치유’의 일본어 발음으로 보는 편이 온당해 보인다. 쾌유, 치유라는 꽃말과 달리 <카이유>의 작가는 1950년 경찰의 오발 사고로 숨졌고, 미술관 소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김희대 학예사는 이후 지병으로 요절했으니, 이 그림에는 비극적인 후일담들이 서려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채원씨는 “작품이 꼭 미술관으로 와야 한다는 고 김희대 학예사의 말이 지금도 유언처럼 떠오른다”고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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