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작가의 <독>. 1949년 그려 그해 열린 2회 ‘신사실파’전에 처음 참가하면서 출품한 작품이다. 미술사적 의미가 큰 명품이지만, 한국전쟁 뒤로 심하게 훼손돼 복원 수리를 위해 프랑스까지 다녀오는 곡절을 치렀다.
땅에서 갓 솟아난 흙덩어리의 모습일까. 듬직한 독항아리 하나가 화폭을 한가득 차지하며 질박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독의 짙은 갈색빛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감을 드러내면서도, 텁텁한 눈맛까지 안기는 무심의 경지를 펼쳐내고 있다. 그 독항아리 앞으로 눈을 내리깐 까치가 살금살금 걸어간다.
화가 장욱진(1918~90)이 1949년 그린 <독>(45.8×38cm)은 천진난만한 동심이나 해학, 익살을 담은 인물그림으로 기억되는 작가의 일반적인 화풍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독을 비롯한 작품의 배경 색상은 매우 어둡고, 단순화하고 덩어리진 사물의 자취가 강조돼 20세기초 파울 클레로 대표되는 서구 모더니즘 양식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유년시절부터 각별히 좋아했던 새인 ‘까치’와 깔깔한 느낌의 나뭇가지를 넣으면서 특유의 정감과 순수한 미의식을 불어넣는 변용의 묘미를 보여준다.
<독>은 국내 추상화단의 시작과 깊은 인연이 있다. 한국 추상화 선구자들이었던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1948년 결성한 ‘신사실파’ 동인이 이듬해 연 두번째 전시회에 출품됐기 때문이다. 성향상 서구의 모더니즘 추상과는 그다지 맞지않는 그가 <독>을 출품한 건 경성제2고보에서 함께 수학했다가 함께 자퇴하며 미술공부를 하게 된 친구 유영국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독>은 2회 신사실파 전에 출품된 작품 중 현재까지 전하는 유일한 실물로 한국 추상미술사의 초창기를 수놓은 의미가 큰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가 1970년대초 국내 미술품 컬렉터의 최고 대가로 꼽히는 이우복 전 대우 회장의 눈에 띄게 된다. 한 화상이 갈가리 찢겨 화폭이 너덜너덜해진 <독>을 들고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인 100만원에 사라고 흥정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단번에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이씨는 군말없이 100만원을 준 뒤 70년대말 프랑스로 작품을 보내 응급수리를 받게 했다. 당시 이 작업을 맡은 이가 현재 한국 단색조회화의 선구적 작가로 재조명되고 있는 재불원로작가 김기린(82)씨다. 김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생계를 위해 작품 수복업을 함께 했는데, 이우복 선생이 비행기에 실어 <독>을 보내왔다. 작품 자체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힘이 느껴져, 한 삼개월간 작업실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수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김기린 작가의 정성어린 수리 덕분에 해진 화폭을 복원한 <독>은 오랫동안 이우복씨의 컬렉션에 속해 있다가, 2017년 서울옥션 경매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작가의 역대 작품거래가로 최고액인 7억원에 낙찰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가나문화재단 제공
장욱진 작가. 경기 용인 자택에서 말년을 보낼 당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