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점을 찌르는 것뿐 단순한 함정 문제/기하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함수 문제/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풀 수 있는 문제~”, “어떻게 그렇게 니 인생을 바쳐/어떻게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쳐/한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서/한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서~”
지난 18일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이 공연되는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평일 저녁인데도 300석 규모의 객석이 상당 부분 찬 가운데 중간중간 혼자 공연을 보러 온 남성 관객이 꽤 여러명 눈에 띄었다. 뮤지컬은 여성이 선호하는 장르이기에 ‘여성 관객’이나 ‘커플 관객’은 많지만 ‘나홀로 남성 관객’은 매우 드문 편이다. 추리소설 마니아이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는 김수광(30)씨는 “그의 작품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고 해 궁금해서 공연장을 찾았다. 혼자 뮤지컬을 보는 건 처음이라 망설였지만, 보고 나니 원작을 잘 살린 점이 만족스러웠다. 소설과 다른 공연만의 매력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스티븐 킹’으로 불리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한국의 서점과 스크린, 무대까지 접수하고 있다. 일본 문학계의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를 압도하는 판매량으로 국내 출판계에서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 잡은 그의 작품은 상당수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서 개봉됐다. 특히 올해에는 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과 연극까지 잇달아 무대에 오르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 전반의 ‘유행 코드’로 떠오르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작품은 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 베스트셀러와 스테리셀러 석권한 인기 작가 출판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영향력은 서점가의 판매량 순위만 봐도 증명된다. 교보문고의 집계를 보면 지난해 1년 동안 국외소설 중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베스트셀러 1위는 히가시노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1>(2위)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1>(3위)을 제쳤다. <나미야…>는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국외소설로 한국에서만 80만부 이상, 전 세계적으로는 1000만부 이상 판매됐다. 그뿐만 아니다. 히가시노는 연간 베스트셀러 20위 가운데 <기린의 날개>(5위), <가면 산장 살인사건>(6위), <위험한 비너스>(12위)까지 모두 4권이나 이름을 올렸다. 그의 소설은 많이 팔림과 동시에 꾸준히 팔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보문고 스테디셀러 30권 목록에 5권이 올라있을 정도다.
올 하반기에도 그의 소설은 잇달아 출간될 예정이다. 출판사 재인은 7월 말 그의 소설 <살인의 문>을, 9월에는 ‘가가 형사’ 시리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출간할 계획이다. 현대문학 역시 8월 초 ‘매스커레이드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매스커레이드 나이트>를 내놓을 예정이다. 국내에서 히가시노의 소설을 가장 많이 출간한 출판사 재인의 박설림 대표는 “히가시노는 1년에 3편 이상 작품을 쓸 정도로 다작하는 작가인데, 수필 등을 빼고 그의 소설 80% 이상(87종 가운데 74종)이 번역돼 있다. 일본 대중소설에 수여하는 나오키상을 받은 <용의자 X의 헌신>(2006)이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끈 이후 1년에 10종 이상씩 번역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일본 추리소설 전문 번역가 권일영씨는 국내에서 히가시노의 인기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권 번역가는 “신작이 계속 번역되는 것뿐 아니라 판권이 만료돼 절판된 작품이 재간행 되느냐의 여부가 인기의 지속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인데, 히가시노 소설 중 절판된 책들이 새로운 출판사에서 계속 번역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절판된 <백야행>, <환야> 등이 재출간 되었거나 될 예정이다.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의 한 장면. 달컴퍼니 제공
■ 드라마로 영화로 공연으로 다양한 변주 히가시노의 소설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원 소스 멀티유스’의 주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용의자X>(2012), <방황하는 칼날>(2014) 등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또 올초 국내 개봉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비롯해 <비밀>, <변신>, <용의자X의 헌신> 등 일본판 영화도 다수 정식 수입·개봉된 바 있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와 <라플라스의 마녀> 등도 국내 수입이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엔 잇달아 무대에도 오른다. 지난 5월 개막한 창작 초연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이 오는 8월12일까지 공연되고 이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연극으로 만들어져 오는 8월21~10월21일까지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제작사 ‘달 컴퍼니’ 관계자는 “두 작품 모두 대명문화공장의 신규 콘텐츠 개발 지원 프로젝트인 ‘공연, 만나다-동행’의 리딩 공연으로 2016년 첫선을 보였는데, 관객 반응이 좋아 2년여의 준비 끝에 무대에 올리게 됐다”며 “워낙 유명한 작품인 만큼 한국 관객에게 충분히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두 작품은 공연정보사이트인 플레이디비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올해 가장 기대되는 창작 초연 뮤지컬·연극 부문에서 각각 2위와 1위를 차지하는 등 개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용의자X의 헌신> 정태영 연출은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관객층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추리소설 동호회에서 단체관람을 오기도 하고, 주인공이 물리학자와 수학자라 그런지 이공계 전공자 분들도 꽤 많이 보러 온다”고 전했다.
그의 소설만을 소개하는 팟캐스트도 있다. 지난해 1월부터 목요일 마다 팟빵에서 방송 중인 ‘THE 히가시노 게이고’다. 히가시노의 골수 팬을 자처하는 경인방송 원기범 아나운서와 성균관대 박인곤 초빙교수가 함께 진행하는 이 팟캐스트는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히가시노 게이고 전문방송’을 내세우고 있다. 박 교수는 “지난 1년 반 동안 90회 가까이 방송을 진행하며 40편 정도의 작품을 소개했다. 아직도 남은 작품이 많아 향후 2년 가까이는 방송이 가능할 것 같다”며 “단순한 작품 소개뿐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성격·생활·취미 등 개인적 이야기와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 폭넓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나미야 잡회점의 기적>의 한 장면. (주)이수C&E 제공
■ 히가시노, 왜 대중문화의 유행 키워드가 됐나? 그의 작품이 이렇게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며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그가 천재적인 스토리텔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작을 하면서도 작품마다 새로운 소재와 줄거리로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전형적인 살인사건부터 공대 출신으로서의 특성을 살린 과학·의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한다. 원전을 소재로 한 <천공의 별>, 뇌과학을 다룬 <숙명>, 도핑과 스포츠과학을 다룬 <아름다운 흉기>, 타임슬립 구조를 도입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다루는 분야가 폭넓어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군더더기 없이 스피디한 전개와 대화 중심의 작법도 인기 비결이다. 그의 작품이 ‘원 소스 멀티유스’의 원전이 되는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박설림 대표는 “스토리와 장면 전환이 매우 빠르고 이야기도 드라마틱한 편이다. 대화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다 보니 그 자체로 시나리오나 대본 같아 보일 정도다. 특히 최근 몇년 사이의 작품은 타 장르로의 변주를 염두에 두고 쓴 듯한 느낌마저 든다”고 설명했다. 권 번역가는 “히가시노는 어렸을 때 영화에 빠져 감독을 꿈꿨다. 자연스레 텍스트에 영상 문법이 반영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추리소설이지만 인간에 대한 탐구와 사회적 메시지, 감동코드가 담긴 점도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연극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박소영 연출은 “<나미야…>는 판타지적인 부분이 강조된 작품으로 작은 선의가 결국 더 큰 결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려냈다”며 “이런 감동코드는 전 연령대가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또 시공간을 넘어 죽은 사람과 조우한다는 설정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인에게 공통으로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라고 짚었다.
박 교수는 “살인사건을 다루면서도 ‘누가, 어떻게’보다 ‘왜’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와 감성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피해자보다 범인의 심리에 더 집중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작가”라고 설명했다. <백야행>에서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 커플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방황하는 칼날>에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살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해와 공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가 거느린 팬층은 매우 넓고 두텁다. 실제 추리소설의 주요 독자는 남성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 중에는 여성 팬도 상당수다. 포털사이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팬 카페와 일본미스터리즐기기(일미즐) 카페를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권 번역가는 “일미즐 회원이 남성이 다수인 것에 견줘 히가시노 팬 카페는 여성이 절반 이상”이라며 “추리소설이지만 유혈 낭자한 잔인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하는 점이 20대 여성에게 어필한다. 남녀를 불문한 넓은 팬층은 그의 작품이 다른 장르로 계속 재해석되는 또다른 이유”라고 분석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