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젊은 시절 자화상 앞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최민화 작가. 이 그림은 ‘모자를 쓴 자화상’으로 홍익대 재학중인 1976년에 그린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그림 안에 있었다.
작가는 40여년을 오롯이 현장에서 보고 겪으며 화폭으로 옮겼다. 움직이는 역사와 격동하는 사람과 풍경을 수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마냥 재현만 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머리 속을 짓눌렀던 불안, 과거 역사의 잔영, 시대가 바뀌면서 어렴풋이 다가오는 변화의 갈망을 차곡차곡 쟁여넣고 삭혀낸 끝에 저 어질어질한 색감으로 형상과 함께 풀어내렸다.
4일부터 대구미술관에서 시작된 중견 화가 최민화(64)씨의 개인전 ‘천개의 우회’는 거대한 역사 앞에서 자의식으로 충만한 ‘타고난 화가’가 풀어놓는 혼돈과 고난의 기록이다. 최민화 작가의 본명은 최철환이다. 신일고 미술교사로 일하다 1983년부터 ‘민중은 꽃이다’는 뜻의 아호인 ‘민화(民花)’로 활동하며 지난 40여년간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현실을 화폭으로 증언해왔다. 특히 87년 6월항쟁 당시 이한열 걸개그림을 그렸고, 기존 민중미술의 결과는 달리 분홍빛 화면에 방황하는 청년 룸펜들의 모습을 담은 ‘분홍’ 연작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민화 작가의 1999년작 <두개의 무덤과 스무개의 나>의 일부분. ‘분홍’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최민화 작가의 93년작 <붉은 갈대>(부분). 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러 가는 군 트럭행렬을 광주 외곽 들녘에서 지켜보는 건달 청년들의 모습을 선연한 분홍빛 화면에 그렸다. 작가의 대명사와도 같은 <분홍> 연작(1989~1999)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천 개의 우회’는 우회(迂回)라는 제목의 표제어대로 천번을 돌아서야 최민화의 회화를 재조명하는 길을 찾게 됐다는 뜻으로 들린다. 1990년대 진보진영 동료와 후배들에게 ‘구닥다리 리얼리즘 그림 신봉자’라는 편견과 비난에 시달렸던 최민화 작가의 굴곡많은 작품 편력을 총체적으로 되살펴 보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초창기부터 최근까지의 근작들이 집약된 전시장에서는 인상파 화가들과 식민지 시대 조선화단의 천재였던 이인성에 대한 동경과 습작으로 시작해 1970~80년대 엄혹한 시대상황 속에서 자신의 지성과 감성, 시국 현장 체험을 통해 낭만적인 색조의 리얼리즘 회화가 정착되고 이후 동서양의 미술사와 고대 한반도와 세계사에 대한 몰입으로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100여점의 크고 작은 그림들로 보여준다. 대표작 ‘분홍’ 연작(1989∼1999)을 비롯해 6월 항쟁을 그린 ‘유월’ 연작(1992∼1996),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회색 청춘’ 연작(2005∼2006), 한국의 고유미를 그린 ‘조선 상고사’ 연작(2003∼) 등이 골고루 나왔다. 고교생 시절 우연히 본 화랑의 전람회에서 이인성에 빠져 그의 그림들을 숱하게 옮겨 그리며 습작해왔다는 작가가 지난해 18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하고,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 자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펼치게 된 인연 자체도 새겨볼 만하다.
2014년작 <조선진-공후인>. 작가가 최근 공들여 작업하고 있는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연작의 일부다.
들머리에서 만나는 근작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연작들은 모호한 윤곽 속에 역사와 신화 속 인물들이 스멀거린다. 그리스·로마, 힌두, 무슬림 등 동서양 신화들이 낯설거나 친숙한 이미지로 뒤섞여 인류사적인 보편성이라는 차원에서 연결되는 한국적 역사화를 염두에 둔 작품들이다. 구작들인 90년대 초 ‘분홍’ 연작과 6월항쟁 연작들은 발그스레하면서도 희붐한 핑크빛과 누른 빛 가득한 화면을 띠고 있다. 눈이 감겨들어가는 이 몽롱한 색채 속에 한국 근현대사, 동서양 미술사의 온갖 사건들과 사람들이, 그리고 시대상을 부여잡은 작가의 자화상들이 아롱져 있다. 80년대 유월항쟁 연작 속에는 당시 복권되며 처음 작품이 공개됐던 해방기 거장 이쾌대의 인물묘사 필법 등을 곧바로 옮겨넣은 작품(<분홍 아스팔트>)등도 보여 흥미롭다.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성, 분단 앞에 욕망을 저당잡히고 감내해야 하는 한반도 사람의 특수한 정체성을 지난 40여년간 항상 저울질하며 그림을 그려왔다고 작가는 털어놓았다. 아쉬운 건 4개 본 전시실과 떨어져 있고, 창으로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는 3전시실에 대표작인 ‘분홍’ 연작들을 걸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런 배치 탓에 작품의 색채감을 보는 묘미를 반감시켜버렸다. 12월16일까지. (053)803-7901.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대구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