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레바논 쿠벳 두리스 유적지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거트루드 벨. 뉴캐슬대학 제공
“오만하고, 과장이 심하고, 가슴도 납작한 데다, 남자 같고, 세계 여행이나 다니고, 엉덩이나 흔들고, 실없는 말이나 하는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
때로 누군가에 대한 비난은 칭찬만큼이나 그를 잘 알게 해준다. 남성 동료에게 이토록 지독한 욕설과 여성혐오를 들어야 했던 사람, 그는 아랍인들로부터 ‘카툰’(여왕)으로 불린 거트루드 벨이다. 영국의 등산가, 고고학자, 탐험가이자 영국군 정보장교였던 그는 ‘사막의 여왕’ 혹은 ‘여성판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사실 벨을 ‘발견’ 하게 된 것도 앞선
‘혼수래 혼수거’ T. E. 로렌스 편을 준비하면서였다. 그러나 그를 ‘여성판 로렌스’라 부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벨은 로렌스보다 20살이나 연장자로, 로렌스보다 족히 15년여를 앞서 아라비아 사막을 누비며 중동에 대한 책을 펴냈고 이라크 건국에 중대한 역할을 했음에도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3시간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에서도 벨은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거의 비슷한 정보원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선 여성답게 ‘최초’로 이룬 것들이 많다. 잉글랜드 북동부 더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현대사를 전공했다. 1888년 20살의 나이로 여성 최초로 학사취득 자격시험에 통과했지만,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옥스퍼드는 여성이란 이유로 학위를 내주지 않았다. 뛰어난 등산가이기도 했다. 여성 등산복이 없던 시절 그는 치마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정복해나갔다. 1900년에는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엥겔호른 제5봉을 등정해 현재 이 봉우리는 ‘거트루드 봉’으로 불리고 있다. 1914년에는 2400㎞에 달하는 아라비아 중부 사막을 탐험하며 지도를 완성해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장창립자 메달을 받았다고.
1921년 이라크 통치에 관한 회의가 영국 식민지상 윈스턴 처질의 주재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렸다. 당시 53살의 거투르드 벨. 뉴캐슬대학 제공
영국군 최초의 정보장교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벨은 이미 인정받는 아랍 전문가였다. 1894년 첫 에세이집인 <페르시아의 전경>을 시작으로 1907년에는 시리아를 거쳐 유프라테스 강을 여행한 <시리아 횡단기행>을 펴냈다.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벨도 아랍항쟁 당시 오스만제국(터키)에 대항해 아랍 민족을 규합하는 일에 깊이 가담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이라크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파이잘 이븐 후세인을 왕으로 옹립하고, 이라크 헌법 제정을 돕고, 국경을 그리는 일까지 관여한 그가 이후에 쓴 <메소포타미아 행정보고서>는 영국 여성이 쓴 첫 행정 백서였다. 이 또한 언론에서는 “개가 뒷다리로 섰다”면서 폄훼했지만. 이쯤 되면 로렌스가 ‘남성판 벨’이 되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사랑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고학력이었던 그는 사교계에 데뷔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청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24살 이집트에서 만난 연인은 급사로 생이별을 해야 했고, 이후 영사로 부임했던 리처드 다우티-와일리와의 사랑도 그가 갈리폴리 전투에서 숨을 거두며 비극적으로 끝났다. “이 나라에서 나를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라크를 사랑했던 벨은 바그다드에서 혼자 삶을 마감했다. 58번째 생일을 앞둔 이틀 전,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숨을 거뒀다. 자살인지 아닌지는 미지수.
현재 한국에 벨과 관련한 서적이 단 한권도 출간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다행히 고고학에 매료됐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글과 사진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남긴 기록은 편지와 일기가 1600여개, 사진이 7천여장에 달한다. 자료들은 영국 뉴캐슬대학이 디지털화하여
‘거트루드 벨 아카이브’ 누리집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