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 안쪽에 자리한 이문안길 작은 집 구역의 모습이다. 아래 바닥에 온돌과 마루, 아궁이 등이 드러난 조선 전기 한옥터가 있고, 위쪽 유리 데크 위에 터의 한옥집을 복원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250년 전 영조 임금이 즐겨 걸어갔을 길입니다. 세손이던 정조도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까요.”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장이 느꺼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설명하며 가리킨 곳은 지하 전시장에서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는 10여m의 옛길이었다.
약 3m 높이의 조선시대 석축이 양옆에 들어선 이 길은 ‘이문안길’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서울 원도심 종각에서 동북쪽의 인사동 태화빌딩으로 이어지는 통행로의 옛 구간 일부다. 폭 5m를 조금 넘는 길의 북쪽 끝은 17~18세기 인조의 외할아버지였던 중신 구사맹의 집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성장기를 보낸 잠저다.
후궁 소생으로 정통 후계자(적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는 비슷한 처지의 인조에 친밀감을 느낀 탓인지 이문안길을 통해 그의 잠저를 자주 찾았다. 잠저 안 연못에 ‘잠룡지’란 친필 이름까지 하사했다. 이 잠저터는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의 집으로 변했다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식당 태화관이 됐고, 여성교육시설인 기독교 감리회의 태화회관 등으로 운영되다가 80년대 헐려 태화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H5옛 이문안길. 높이 3m에 이르는 석축이 옆에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난 12일 종각 부근 공평동 어귀에 문을 연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이처럼 600년 조선시대와 근대기 서울 도심의 격변사와 그곳을 오간 사람들의 무수한 일화를 품은 국내 최대 도시 유적 박물관이다. 26층 신축건물인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의 1000평 넘는 면적에 시장터와 관아, 주거한옥터, 골목길들이 오밀조밀 들어찬 16~17세기 조선 한성의 도심부가 드러났다. 2014~15년 발굴된 공평동 조선시대 도시유적을 통째로 보존해 유리판 보행 데크와 각종 전시물을 함께 곁들이는 구성으로, 개별 유적이 아닌 면 위주의 옛 경관을 살려냈다.
이문안길과 전시관 중심을 가로지르는 전동골목길은 직접 걸을 수 있다. 주위에 굵직한 석축 담장과 기단, 널마루, 배수로 등이 흩어진 시전과 집터들의 흔적이 스쳐간다. 그 시절 인파와 물자로 흥청거렸던 당대 번화가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생동감이 전해진다. 초석, 적심석, 마루, 온돌 등이 남아있는 크고 작은 주거터 3곳은 유적 옆에 모형을 두거나 집안 내부를 투시할 수 있는 브이알(VR) 체험공간을 만들었다. 이문동 가옥의 경우는 유적 위에 마루와 사랑방 등 실제 한옥 구조를 올리며 집터마다 각기 다르게 복원해놓았다. 데크 곳곳에 놓인 진열장 유물들도 호기심 동하는 것들이 꽤 많다. 원나라에서 수입된 용무늬 돋을새김 된 고급 청화백자 파편을 중국과 프랑스에 소장된 완제품 도판, 재현품과 비교전시한 대목에선 조선이 이미 글로벌 교역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정그니’ ‘향옥’ ‘은비’ 같은 여인네들의 정겨운 이름이 굽에 적힌 백자 조각들은 생활사의 감동을 안겼다.
“압도적 스펙터클”이란 건축사가 조재모 경북대 교수의 표현대로 인구 천만 넘는 대도시 도심에 대형 현장전시관이 출현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동안 서울시가 도심 유적 보존 활용을 놓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교훈을 얻었기에 이런 전시관이 탄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00년대 들어 청진동 재개발과 서울시청 지하의 군기시터, 옛 동대문운동장 일대의 하도감터 유적 등 무수한 도시유적이 발굴됐지만, 부분 이전·부분 복원·철거 등에 그쳐 소중한 유적이 상당 부분 사장되는 아픔을 겪은 탓이다. 이번에 들어선 전시관은 과거 사례들을 감안해, 건축주에게 용적률을 크게 늘려 지상 4개층을 더 짓게 해주고 지하 1층을 전시관으로 기부채납받는 형식으로 ‘빅딜’한 결과물이다. 시 쪽은 도심정비 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위치에 전면 보존하고, 건축주에게는 용적률 이득을 안겨 참여를 이끌어내는 ‘공평동 룰’을 만들어냈다고 자평한다.
그렇지만, 마냥 만족하기엔 여러 한계와 과제들이 녹록지 않다. ‘공평동 룰’은 강제성 없는 타협모델이다. 앞으로도 이어질 종로, 중구 등의 도심 재개발 때 비슷한 유적이 나오면 모두 이런 협상 방식으로 보존해야 할지 고민거리다. 공평전시관 또한 터파기할 때 유적들을 떠냈다가 다시 가져와 일부 위치를 재조정하며 인공복원했기에 온전한 역사적 진정성을 확보했다고 단정할 순 없다. 역사도시에 맞는 보존방식, 전시방식을 계속 찾고 개발해야 한다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서울시는 2012년 ‘사대문안 문화유적 보존방안’을 고시한 전후로 사대문안 주요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1000곳 이상의 유적에 대한 기본 정보를 축적해왔다. 지금도 계속되는 개발지역 시발굴을 통해 유적 정보가 계속 쌓이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을 통합관리하는 시스템은 정밀하게 구축되어 있지않다. 매장문화재 관련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취합해 도시계획 과정에서 재개발 사업의 사전 요건 등에 선제적으로 반영하는 제도를 구축해야한다는 게 발굴 전문가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12일 전시관 개관식에서 “서울시에서 발굴되는 전 유적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정 안되면 (유적이 나온 땅을) 사기라도 해야 한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시스템상의 한계 말고도 문화유산의 이전, 철거를 능사로 생각하는 1970~80년대 개발주의 시대의 인식을 지닌 시 공무원들이 여전히 적지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생각을 바꿀 복안 없이 시장의 의지가 현장에서 관철될지는 미지수라는 게 문화재계의 중론이다. 서울 도심 유적을 조사하며 시 관료들과 숱하게 접촉했다는 한 발굴기관 관계자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보존된 현장 유적들을 가장 열심히 답사하고 공부해야할 이들은 바로 시청 관료와 구청 공무원들”이라며 “도시 유산의 실태와 보존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현장 교육을 강화해 공무원들의 시각부터 확 바뀌어야만 도시 유적 보존 정책이 활성화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