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미래과학자거리의 야경 모습. 북돋음 출판사 제공
▶ 지난 18~20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여러 화젯거리를 낳았지만, 화려해진 평양의 거리 모습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건물들의 화려한 색채, 다양한 모양의 고층 아파트, 첨단 도시같은 과학자 거리 등이 변화하는 북한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태어난 평양이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본다.
단 사흘이었지만, 흥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난 18~20일 남북정상회담 기간 동안 카메라에 잡힌 평양의 거리는 전세계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평양 시민들의 표정과 발걸음엔 활기찬 기운이 흘렀고, 초가을 파란 하늘 아래 대동강을 품에 안은 평양은 밝고 환했다. 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에 다녀온 이들도 열띤 목소리로 변화를 증언했다.
12년만에 평양을 방문한 유홍준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동선이 제한돼 있어 평양 곳곳을 보긴 힘들었지만 확실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며 “고려호텔 앞 건물들이 분홍색으로 외장이 돼 있었다. 고층건물이 많이 늘었고 곡선미를 강조한 건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동북아교육문화재단 후원으로 평양과학기술대를 설계했던 이형재 가톨릭관동대 건축학부 교수(전 정림건축 사장)도 “이번에 평양을 직접 다녀오지 못해 동영상과 사진으로만 봤지만 예전과 차이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설계를 위해 평양을 여러번 오갔던 2000년 초반부터 개교 직전 마지막으로 평양을 다녀온 2010년까지를 돌이켜보면 물자가 부족해서인지 회색빛 도시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이젠 도시 색채가 화려해진 느낌이 강했다”고 말했다. 몇년 전 북한을 떠나온 한 새터민은 “최근 평양 인근에 외장재를 생산하는 공장들이 들어섰다”며 “방수·내구성을 위해 낡은 건물에 분홍·녹색 등 색깔이 있는 석회 카바이드를 덧붙여 바른 경우가 많아 도시가 깔끔하고 화사한 분위기가 살아났다”고 전했다.
사회주의 이념 따라 설계
남북관계 봄바람 덕에 최근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지만, 도시·건축 전문가들에게 평양이란 도시는 늘 진지한 탐구정신을 자극하는 곳이었다. 1500년 역사를 간직한 고도이자 사회주의 도시계획 이념에 따라 설계된 계획도시. 산과 강 같은 자연지형과 인공물이 어우러진 빼어난 경관, 대규모의 공공건물과 기념물이 가득찬 극장같은 도시. 베일에 쌓인 게 너무 많아 궁금한 도시이자 개혁개방과 함께 밀어닥칠 자본주의의 파고를 눈앞에 둔 실험적 공간.
민족적 동질감을 넘어 북한 사회의 다층적인 모습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인상비평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북한의 도시와 건축 환경의 구성 요소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도시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일성 광장을 그저 독재정권의 야욕이 서린 공간으로 보고 말 것인가, 아니면 평양만의 특징적 도시 구축 환경을 발견해낼 것인가. 이 사소한 차이는 북한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에 큰 차이를 낳을 수 있다. 현재 북한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미래 북한의 구축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예측해보는 데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임동우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
지난 7월 평양의 과학기술전당 모습.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제공
평양 남북정상회담 기간 동안
변화된 평양 모습에 전세계 주목
색깔 화려해지고, 곡선미 강조돼
한국전쟁으로 ‘대동문 빼고 사라져’
사회주의 따른 계획도시로 부활
도시 안에 농지, 집·직장 가까워
무제한 팽창 통제 녹지 풍부해
김정일 집권 이후 과시적 색채
경제난으로 대규모 사업 중단
김정은 시대와 함께 다시 탄력
신중하고 긴 호흡으로 개발해야”
평양이란 도시를 이해하는 작업은 이념적 편견이나 과도한 환상에서 한발 물러나 이 도시가 만들어진 역사와 최근의 변화를 정확하게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평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성은 586년 대동강과 보통강을 천연해자 삼아 축조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된 데 이어 한국전쟁 기간 동안 무참히 허물어졌다. ‘미군이 지표로 삼고자 남겨놓은 평양성의 대동문을 빼놓고는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잿더미로 변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모습은 대부분 1950년대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평양의 뼈대는 ’북한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건축가 김정희(1921~1975)가 1953년 만든 마스터플랜에서 비롯됐다. 해방 직후 북한의 첫번째 해외 유학생으로 선발된 김정희는 1950년대 초반까지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뒤 1960년대 중반까지 건축가동맹 초대 위원장이자 평양도시계획국 국장으로 북한 건축계를 이끌었다. 김정희는 김일성 주석의 절대적인 신임에 힘입어 폐허가 된 평양에서 ‘사회주의 도시의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이념은 도시의 무제한 팽창을 막아 적정 규모를 유지하는 한편, 도시와 농촌의 구별을 없애고 노동자들의 출퇴근이 쉽도록 일터와 집을 가까이 배치하는 것이다. 풍부한 녹지의 확보도 필수다. 도서관, 극장 같은 공공문화시설이 풍부하고, 군중집회와 선전을 위한 거대한 광장 등이 랜드마크로 공간을 구획하는 것도 사회주의권 도시들의 특징이다.
소련에서 유학한 김정희 역시 평양 마스터플랜에 사회주의 도시이론을 적용했다. 평양을 몇개의 단위로 나눠 녹지가 완충 역할을 하도록 했고, 도시와 농촌을 통합하며 가로 세로 250m의 대형 격자형 블록 안에 주거시설과 학교 및 서비스시설, 생산시설을 함께 넣는 주택소구역계획을 제안했다.
건축가 임동우(프라우드 건축 대표)는 이를 “생산의 도시, 녹지의 도시, 상징의 도시”로 요약한다. 현재 평양은 생필품을 생산하는 경공업 위주의 공업지역 비율이 전체 평양 면적이 17%, 시가지로 개발된 곳(반경 10㎞)이 20%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농업 지역이다. 1인당 녹지 면적이 40㎡에 이를 만큼(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은 20㎡) 녹지가 풍부하다. 김현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부)는 “주거지와 공장이 붙어 있다거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바로 농지가 나타나는 모습은 저개발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자급자족 기능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도시 이론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7월 고려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역과 인근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도시·건축 통해 체제 경쟁
현재 평양은 크게 대동강 서쪽과 보통강 사이 구도심인 ‘본평양’, 일제 때와 해방 뒤 집중적으로 개발된 대동강 동쪽 ‘동평양’, 1970년대 이후 개발된 보통강 서쪽 ‘서평양’ 등 세 구역으로 나뉜다. 특히 본평양과 서평양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2개의 강한 축선을 형성했는데 김일성광장-주체사상탑, 만수대조선혁명박물관-노동당 창건기념탑이 동서 일직선에 놓여 있어 정치적 위계를 강조한다.
평양은 엄격한 인구통제와 토지이용 규제로 인해 서울처럼 몸집을 불리기보다는 도심 재개발 등의 방식을 취해왔다. 특히 북한은 거리(가로)를 중심으로 개발하되 고층아파트를 대로에 면하도록 배치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1950년대 말 동평양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청년거리·보통문 거리, 1960년대엔 개선문거리·모란봉거리 등이 생겨났고, 1970년대엔 15~20층 높이의 아파트가 즐비한 천리마거리, 서성거리, 낙원거리가 개발됐다. 1980년대 들어선 창광거리·경흥거리에 30~40층 아파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권력의 전면에 나선 1980년대 이후부터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진 1990년대 중반까지 평양은 ‘국제도시화’, ‘문화도시화’ ‘혁명도시화’를 지향하며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고, 과시적인 색채를 띠게 됐다.
‘서울-평양 도시 분야 교류 기초 연구’를 진행 중인 권영덕 서울연구원 도시공간실 선임연구위원은 “평양은 도시·건축을 통해 체제 경쟁을 했다”며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당시 사례를 들었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시민들 앞에서 연설한 능라도 5·1경기장(1989)은 15만명 수용 규모로 당시에도 지금도 세계 최대 규모다. 오스카 니마이어의 브라질리아 대성당과 흡사한 원추형의 평양빙상관을 비롯한 청춘거리의 각종 경기장, 평양교예극장, 동평양대극장, 평양국제영화회관 등 과감한 디자인이 등장했다. 서울 잠실의 아시안게임·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처럼 평양 역시 서평양에 광복거리를 개발하고 탑형, 와이(Y)자형, 아이(I)자형, 바람개비형, 곡선형 등 다양한 형태의 아파트를 선보였다. ‘도시 속의 공원이 아닌 공원 속의 도시를 만들자’는 구호 아래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공원·광장이 조성됐다. 이후 경제난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이런 대규모 토목사업은 한동안 중단되고 최소한의 주택 보급만 이뤄졌다.
김정은 시대, 개발사업 속도
하지만 ‘김정은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개발사업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김정일 시대에 시작돼 김정은 시대에 완공된 미래과학자거리(2015년)와 려명거리(2017년)는 70층 높이의 다양한 아파트 디자인, 깔끔한 상점, 호화로운 식당 등으로 눈길을 끈다.
권영덕 선임연구위원은 “려명거리나 미래과학자거리처럼 치적이 중시되는 곳 말고도 전기·난방 인프라가 잘 돼 있는 평양 중구역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개발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짚었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장경제에 더 밝아 각종 개발사업에 민간 자본의 활용 폭을 넓혔기 때문이다. 이영성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는 “‘전주’로 불리는 이들이 디벨로퍼로 나서 군부·당 간부들과 네트워크를 맺고 사실상 시행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북한을 떠나 남한 대학에서 도시와 건축을 전공한 한 새터민은 “여전히 주택 소유·처분권이 없는 등 건축 과정에서의 법적 제도나 행정 절차는 달라진 게 없지만 관리권·입주권의 형태로 사실상 분양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낳는다. 이영성 교수는 “평양은 그동안 은둔의 도시였던 만큼 세계적으로 관심이 매우 높고, 역사·경관 면에서도 매력이 넘치는 도시”라며 “서울에서 200㎞ 밖에 떨어지지 않고 우수한 과학기술인력도 많아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대기오염·교통체증·지역격차·에너지 문제 등 60여년간 서울이 무분별하게 팽창하면서 겪은 문제들을 앞으로 평양도 어느 순간 맞닥뜨릴 수 있다”(권영덕 선임연구위원)는 걱정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건축가협회 황두진 남북교류위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은 바깥 세상의 트렌드에 관심이 많고 민감하지만 도시의 인프라 투자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며 “한반도를 어떤 환경으로 만들어나가야할지 고도의 신중함과 절제력,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 남북 도시·건축 전문가들의 교류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