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씨름꾼들이 기량을 겨루는 장사씨름대회의 경기 장면.
남북한의 ‘뒷심’이 이땅 문화유산의 새 역사를 썼다. 한민족 고유의 힘겨룸놀이인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목록에 남북의 막판 합의로 사상 처음 공동등재되는 결실을 안았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가 26일 오후(한국시간)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열린 산하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 위원회(이하 무형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긴급안건으로 올라온 씨름의 남북공동등재 신청건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고 이날 발표했다. 청 쪽은 “유네스코 쪽이 남북 합의에 의한 공동등재의 중대성을 감안해 개회 날에 씨름을 바로 긴급안건으로 올려 24개 나라 대표로 구성된 무형유산위원회에서 등재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복수의 나라가 개별적으로 신청한 문화유산에 대해 공동등재를 결정한 것은 유네스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앞서 유네스코의 무형유산위 산하 전문가 평가기구는 지난달 29일 ‘대한민국의 씨름(전통 레슬링)’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씨름(조선식 레슬링)’에 대해 모두 ‘등재 권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무형유산위원회는 이와 관련해 “남북의 씨름이 그 연행과 전승양상,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의미에 있어 공통점이 있고, 평가기구가 남북 씨름을 모두 등재권고한 점을 고려해 전례 없는 개별 신청유산의 공동등재를 결정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공동 등재된 씨름의 공식명칭은 ‘씨름, 코리아의 전통 레슬링(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이다. 애초 한국은 ‘대한민국의 씨름(전통 레슬링·Ssireum, traditional wrestling in the Republic of Korea)’이란 명칭으로 2016년 3월 등재신청서를 냈고,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씨름’(조선식 레슬링·Ssirum, Korean wrestli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란 명칭으로 지난해 3월 유네스코에 따로 등재 신청서를 냈으나 무형유산위원회의 최종 심사를 앞두고 남북 당국의 극적인 합의로 공동등재 결정을 이끌어냈다. 남북한이 다른 ‘씨름’의 영어표기는 두가지를 함께 표기하는 방식으로 확정했다.
외교부와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씨름의 공동등재가 제안된 건 올해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뒤부터다. 유네스코 한국대사와 유네스코 사무국이 남북화해협력의 일환으로 씨름을 공동등재하자는 제안을 북한 쪽 유네스코 관계자들에게 타진했다. 뒤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는 길에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과 만나 공동 등재에 대한 공감대를 밝히면서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이달 15~17일 아줄레 사무총장의 특사가 방북해 북한 당국의 합의까지 이끌어내면서 막판에 두 신청안을 하나로 묶는 공동등재 추진이 성사됐다.
유네스코는 씨름의 공동등재 결정을 통해 주목할 만한 예외적 선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별개로 신청한 유산이 공통성이 클 경우 하나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목록에 올릴 수 있다는 특수한 선례를 처음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애초 공동등재 전에 남북이 별개로 낸 신청서를 거둬들이고 통합신청서를 만들어야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최종심사까지는 시간이 촉박해 우선 씨름의 공동등재를 확정하고 나중에 등재신청 절차를 보완하는 식으로 입장을 조율했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이 각기 제출한 신청서의 내용을 조율해 통합 신청서를 만드는 보완 작업을 거쳐야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26일 열린 무형유산위 회의는 이런 후속 작업을 요구하지 않고 목록 등재를 최종적인 결정으로 확정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무형유산위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씨름의 공동등재를 결정하면서 위원들은 남북한 쪽에 어떠한 사후 조치도 요구하지 않았다”며 “씨름 자체가 남북한이 신청서를 따로 냈어도 경기방식이나 문화적 요소 등이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선례가 될 것으로 본다”고 짚었다. 이번 공동등재 결정으로 ‘씨름’은 종묘제례·종묘제례악, 강릉 단오제, 제주 해녀문화 등에 이어 한국의 20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북한에서는 아리랑과 김치 만들기에 이어 세번째 등재유산이 됐다. 북한은 2016년에도 씨름의 등재신청서를 냈으나, 그해 열린 11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정보 보완’ 판정을 받아 등재를 미룬 바 있다.
국내 문화재계에서는 씨름의 공동등재를 계기로 남북이 공유한 다른 자연문화유산에 대한 추가 공동등재나 기존 무형문화유산의 통합을 위한 협의가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남북이 지난 수년간 따로 신청해 등재했으나 사실상 같은 내용의 문화유산인 ‘아리랑’과 ‘김치’가 우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태봉국 철원성과 한국전쟁 관련 유적이 정전 이래 60여년간 잘 보존된 생태환경 속에 묻힌 비무장지대(DMZ)의 세계복합유산 등재도 논의의 물꼬가 트여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