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주(왼쪽)·임형남 건축가가 지난 13일 서울 서교동 이건하우스 갤러리에서 자신들이 설계한 집을 그림으로 담은 20폭 병풍 앞에 서 있다. 김용관 사진작가
외환위기 여파로 많은 건축설계사무소가 문을 닫았던 1998년, 시대와 역행하며 사무소를 낸 용감한 부부가 있었다. 가온건축의 임형남·노은주 소장이다. 부부 두 사람 모두 본래 물욕이 강한 성향이 아니라 열심히 일한 것에 견주면 돈 되는 일은 많이 하지 못한 편이었다. “이제까지 문닫지 않고 버텨온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이들이 20년 작업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28일까지 서울 서교동 이건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건축의 즐거움’.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이들은 건축의 즐거움으로 ‘만남의 즐거움’을 꼽는다. “좋은 땅을 만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임형남 소장은 이 즐거웠던 만남을 떠올리면서 가온건축이 설계한 20채의 집을 골라 20폭 병풍(가로 5.4m, 세로 5m)에 그림과 글씨로 옮겨놓았다. 수묵화로 옮겨진 건물의 자태도 맑고 따뜻하지만, 그 집을 지은 과정과 건축주와의 인연 등을 소개한 짤막한 수필이 맛깔나다. 건축주, 즉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는 이 글을 읽다보면, 마치 기행문 같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의 상담기 같기도 하다. 결국, 건축의 가장 큰 즐거움은 땅·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건축주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지켜볼 때 아니겠는가. 집주인의 즐거움이 건축가의 즐거움인 까닭이다. 병풍에 그려진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경기도 가평의 존경과 행복의 집. 가온건축 누리집
‘존경과 행복의 집’(2014년)엔 40대에 막 접어든 부부가 살고 있다. 부부는 자신들의 인생 핵심 가치로 존경(남편)과 행복(아내)을 꼽는 이들이었다. 청첩장에도 존경과 행복이란 단어를 넣었다. 평소 임형남·노은주 소장이 쓴 책을 눈여겨 봤던 이들은 경기도 가평에 신혼집을 짓기 위해 가온건축을 찾아갔다.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은 이러이러한 곳이다’라는 설명부터 시작하는 게 보통 설계를 의뢰하는 이들의 태도인데, 처음부터 존경과 행복이라는 ‘큰 말’을 집에 담아달라고 했다. 임형남 소장은 “좋으면서도 어려운 숙제를 받았다”고 답했다. 임형남 소장은 “존경과 행복이란 두사람 또는 그 이상의 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들 간의 관계 혹은 시선이 아닐까 펄펄 끓는 애정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방향과 움직임을 존중해주고 길을 비켜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집을 두채로 나눠 ‘존경동’에는 부부의 사무실과 공방을 넣고, ‘행복동’에는 침실과 주방, 다실을 넣었다. 행복동에선 먹고 자고 차를 마시고, ‘존경동’에선 일하고 책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본다. 부인 한서형씨는 “재택근무를 하다보니 부부가 하루종일 함께해야 하는데 공간이 분리돼 있어 가끔씩 혼자 있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게 가능하다. 서로의 자율성과 자유를 존중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존경동과 행복동을 오가려면 반드시 밖으로 나가야하기 때문에 이사와선 하루라도 집밖으로 나가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 “하늘이나 나무를 한번이라도 바라보지 않은 날이 없기에” 부부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 수 있다.
충남 공주에 있는 루치아의 뜰. 가온건축 누리집
지난 2013년 충남 공주에서 문을 연 ‘루치아의 뜰’(2013년)은 1964년 지어진 주택을 개조한 찻집이다. 너른 뜰 옆에 방 두칸, 다락 한칸 다 합해 10평 정도 되는 집은 일곱 식구가 살아가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이사온 지 3년 만에 남편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내는 혼자 아이 다섯을 기르며 ‘할머니’가 됐고 세상을 떠났다. 차(茶)를 공부하는 석미경(세례명 루치아)씨가 동네를 돌아보다 이 집에 꽂혔다. 3년동안 비어 있어 파란 대문엔 녹이 슬고 깨진 장독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으나 그는 “세월의 아름다움”을 봤다. 평소 책·잡지를 통해 임형남·노은주를 잘 알고 있었던 석미경씨는 “이 집을 귀하게 살려주실 분”을 찾아 가온건축의 문을 두드렸다. 석씨는 “가온건축 이전에 이 집에 와봤던 설계자들은 ‘고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드니 새로 다 지으라’고 권유했는데 임형남 소장은 ‘세월이 가장 좋은 인테리어’라고 해서 그 말에 반해버렸다”고 말했다. 건축가는 녹슨 대문과 시멘트 기와를 그대로 남겼고 내려앉은 툇마루는 뜯어 선반과 탁자로 부활시켰다. 습하고 어두운 부엌엔 큰 창을 냈다. 석씨는 “창을 통해 내가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손님들은 ‘엄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들 한다”며 “집이 너무 예쁘다며 ‘딱 뜯어서 서울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했다.
속초의 ‘도문 알레프’(2016년)의 건축주들이 가온건축을 찾기 전까지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 건축에 관심 많은 남편은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건축가와 꼬박 두달 가량 만나 설계안을 의논했다. “우리가 원하는 계획이 있는데 건축사는 계속 자기가 짓고 싶은 집을 버리지 않더라고요. 나중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건축은 건축가에게 맡겨라’며 버럭 화를 냈어요. 그러나 임형남·노은주 부부는 루이스 칸의 ‘집속의 집’ 개념을 넣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그거 너무 재미있겠다’고 반응해서 깜짝 놀랐어요”(부인 이다효지)
그런데 설계가 거의 마무리되고 설계 허가를 받으려다 보니 건물이 너무 크고 마을과 안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건축주들에게 떠올랐다. “속초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에 위화감 줄 수 있는 집이 들어서면 우리도 불편해질 것 같다”는 말에 건축가들도 공감했다. ‘집속의 집’은 백지화하고, 집을 안채와 사랑채로 나눴다. 건축가들은 본래 건축주들이 철거하려던 옛 집도 살려냈다. 수리 과정에서 이 집이 본래는 설악산의 한 암자에 있던 스님 요사채였다는 사실도 밝혀졌고 이 집에서 자기가 태어났다며 반가워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120년 세월을 옛것과 새것으로 섞은 이 집은 손님들이 묵어가는 곳이다.
서울 평창동의 ‘요산요수’(2017년)는 취향이 분명한 부부가 사는 집이다. 북한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언덕 꼭대기 땅을 구한 부부는 풀장이 있고, 거실·식당과 침실이 적당히 분리돼 있으며, 개와 고양이를 기르기 좋은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밖을 향해 열린 곳과 닫힌 곳이 매우 명확하고 접근 방법도 뚜렷해서 집을 계획하는 것은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있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고 임형남 소장은 말한다. 건축가들은 “땅은 커 보이지만 사실 이 집은 크진 않다. 집을 더 풍성하게 만들려면 공간마다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그러면 집이 커진다”고 조언했다. 건축주들은 “평생 아파트 등에서만 살다가 우연히 유기동물을 키우면서 단독주택의 필요성을 절감해 집을 짓게 됐다”며 “외관은 모던한 느낌이지만 디귿자 구조, 창마다 집의 다른 부분이 보이는 점,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나눈 점 등에선 한옥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했다.
임형남·노은주는 전시장에 이런 글을 내놓았다. “제임스 조이스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보편성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학(學)이나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구하는 답 또한 여기 가까운 이곳, 이 시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에 쓴 글을 2018년에 옮겨 적음.”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