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국내 미술판은 국공립미술관 수장의 대폭 물갈이와 더불어 제도개혁을 둘러싼 논의가 뜨거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7일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1층 개방형수장고 내부 작품들 모습. 작고 조각가 류인의 인체상 <윤의 변 Ⅱ>가 정면에 보인다.
‘나이 든 작가가 관장을 맡는 시대는 끝났다.’
새해 미술판을 내다보는 미술인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최근 2년 사이 국내 지자체 등의 공공미술관에서는 40~50대 소장 큐레이터들의 관장직 진출에 따른 물갈이가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2000년대초 대안공간 루프를 운영했던 서진석 기획자가 2015년 경기문화재단의 백남준아트센터장에 임명된 게 신호탄이었다. 뒤이어 2016년 제주도립미술관장에 소장기획자 김준기씨가 임명돼 지난해까지 재직했고, 2017년에는 부산비엔날레 전시공간인 부산현대미술관의 관장을 현지 대안공간에서 활동해온 독립기획자 출신의 김성연씨가 맡았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 더욱 거세졌다. 지역 미술인들의 아성이던 광주시립미술관장 공모에 광주·부산 비엔날레 기획자와 수원아이파크미술관 전시감독으로 일했던 전승보씨가 낙점됐다. 서울시립미술관, 오시아이 미술관 등에서 청년 작가 전시를 꾸렸던 큐레이터 출신 최정주씨가 제주도립미술관장에 임명된 것도 화제를 낳았다. 대구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지낸 안규식씨는 제주김창열미술관 관장으로, 전임 관장인 기획자 김선희씨는 부산시립미술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해 초에는 새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임명된다. 최종 후보 3명은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중견 기획자로 주요 공공 미술관장과 비엔날레 총감독 등을 거친 김홍희, 윤범모, 이용우씨다. 지난해 7월 이래 관장이 공석인 대구미술관과 최효준 관장이 성희롱 관련 의혹으로 직무정지된 서울시립미술관도 올 상반기에 현장기획자 출신들이 새 관장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쌍벽을 이루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경우 중견·소장 기획자 5~6명이 관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기획자 출신 관장들의 약진은 자연스럽게 미술판 지형 변화를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랜 유학 생활을 하거나 대외 전시교류, 레지던시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세계 현대미술의 현장과 긴밀하게 교감해왔다는게 강점이다. 90년대 이후 국내 사회와 미술계의 변화에 민감한 감수성을 보이면서 연관된 흐름들을 전시판에 풀어온 경험도 갖고 있다. 과거 작가 출신 관장들보다 미술판 체질 개선에 훨씬 능동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운영구조, 전시기획, 작가지원 등에서 달라진 행보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이준희 <월간미술> 전 편집장은 “40~50대 전문기획자들의 관장 진출은 인맥이나 학맥에 좌우되는 낡은 시스템을 벗어나 객관적인 활동경력, 역량을 중시하는 쪽으로 미술제도권의 풍토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진통이 예상되는 부분도 있다. 공공미술관에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지목되는 정부, 지자체 행정직 공무원들과의 소통이다. 소신 강한 기획자 출신 관장들은 직제, 인사, 예산 등을 놓고 갈등을 빚을 소지가 크다. 관료들과 교감하는 개혁 리더십 확보가 관건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부실 공사 논란 속에 지난 연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사례는 달갑지 않은 징후로도 비친다. 수장고 온습도 조건이 완비되지 않은 채 이송된 소장품들을 방치하고, 시설점검도 미진한 상태에서 개관일정에만 급하게 맞춘 파행이 드러난 까닭이다.(<한겨레>12월 20일치 19면) 관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개관전시에만 역할이 한정된 학예직 기획자들은 침묵했고, 문화체육관광부 행정 관료들의 주도로 개관 작업은 강행됐다. 앞서 문체부는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장 최종 후보군이 확정된 뒤 후속 역량평가를 생략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특정인사 밀어주기라는 의혹이 일자 슬그머니 철회하기도 했다.
지난달 14~18일 서울 청담동 왑(WAP)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젊은 화랑주들의 작품장터 ‘더 갤러리스트’의 전시 모습. 화랑주들의 연합단체 ‘협동작전’이 지난해 10월 차린 ‘솔로쇼’에 이어 기획한 2번째 장터였다. 기존 화랑들의 대형장터와 달리 화랑주의 취향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열린 틀거지로 눈길을 모았다.
2017년 총거래액 4942억원으로 역대 최대규모를 기록하며 회복세로 들어선 미술시장 또한 새해 변화의 기로에 놓였다. 팔리는 작품, 부스 위주로 획일화한 화랑 아트페어(미술장터)와 원로작가 단색조 그림 중심의 유통 관행을 벗어나, 새 형식으로 젊은미술을 띄우려는 신세대 화랑업주들의 발걸음을 주시할 만하다. 이들은 지난해 연합단체를 꾸려 대안공간 스타일의 게릴라 장터를 서울 시내 옛 여관 건물 등에서 선보여 각광 받았고, 올해도 새 틀거지의 열린 장터를 잇따라 차릴 계획이다. 지난 수년간 정부 지원으로 불어난 청년작가 장터들은 올해도 전국 곳곳에서 줄줄이 열려 ‘그들만의 판매리그’를 넓혀갈 참이다. 대표적인 청년작가 장터로, 지난해 경매사와 손잡고 홍콩에도 진출했던 유니온아트페어가 자생적 수익구조를 갖춰 시장에 안착할지도 관심을 모은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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