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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쿨한’ 엄마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들

등록 2019-01-19 13:20수정 2019-01-19 13:21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⑤ 롤린다 샤플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자화상>

롤린다 샤플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자화상>, 패널에 유채, 1820년께, 영국 브리스틀시립박물관.
롤린다 샤플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자화상>, 패널에 유채, 1820년께, 영국 브리스틀시립박물관.
시험도, 상장도, 심지어 반장 선거도 없는 ‘경쟁청정지대’ 혁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9살 딸아이. 이 아이가 지난여름, 난생처음 피아노대회에 나갔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은 아닌 척했지만 혼자 불타올랐다. 딸의 실력을 처음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장이 아닌가. 착실하게 연습해온 아이였기에, 곡도 일부러 난이도 있는 것을 택했다. 딸은 역시나 군말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흐뭇해진 나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큰소리쳤다. “이만큼 연주 실력을 만들었으니 상 안 받아도 좋아. 그 자체로 멋져!” 그리고 대회 당일. 리허설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무대에 오르니 아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어이없는 실수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기대에 부풀어 상기됐던 내 표정도 점차 굳어졌다. 연주를 마치고 나온 딸은 엄마의 예상과는 다르게 밝아 보였다. “처음 참가한 대회인데 이 정도면 잘한 거지!” 이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라 딸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실수하면 뭐 어때’라고 생각했는데 왜 밥은 안 먹힐까. 대회 후 방문한 식당에서 마치 돌을 씹듯 점심을 먹는 나를 보고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근데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여?” 그 말에 서둘러 표정을 고쳤지만, 결국 숟가락을 놔야 했다. 그 하루는 그 상태로 보냈다. 뭔가 멍한 상태로, 식욕도 표정도 없이. 그리고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제야 눈물이 터졌다. 초연한 척했지만 사실 나는 경쟁에서 이긴 딸을 욕심내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한 건 그다음이었다. 거짓말같이 후련함이 찾아왔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울음이 그날의 ‘폐막커튼’ 구실을 한 셈이다.

만약 이런 과정 없이 처음부터 실망감을 나 자신에게도 숨긴 채 ‘엄마답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이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고 계속 남아, 아이를 대할 때 독이 될지도 몰랐다. 아이를 키우며 처음 맞이한 감정을 처리할 시간이 내게도 필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기에. 일단 아이만 낳으면 모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의 어른스러움’을 기대하는데, 사실 세상에 저절로 당연해지는 건 없다. 그러니 엄마에게도 ‘성숙의 시간’을 조금 허락해주면 안 될까. ‘쿨하고 멋진 엄마’가 되기 위해, 내게도 반나절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화가 롤린다 샤플스(1793~1838)의 어머니인 엘런 샤플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자화상> 속 모녀의 모습은 한눈에도 서로에게 품은 친밀감과 신뢰감의 크기가 어떠한지 가늠하게 해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을까? 그 자신이 파스텔 초상화가였던 엘런은 자신의 딸이 유화로 된 초상화를 시도할 때 지나치게 불안해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극소수의 여성 미술가들만이 활동했던 19세기 영국에서 딸이 즉시 성취를 내지 못하면 엄마의 가슴은 더욱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실망과 불안을 딛고,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 딸의 작업 내용을 꼼꼼히 기록하는 매니저 구실을 자청했고, 딸의 재능을 믿고 격려하며 차근차근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엘런 같은 엄마까지는 아니어도, 딸에게 상처 주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한테 ‘엄마, 왜 이렇게 힘이 없어’라고 얘기했다니까. 분명 내가 실망한 걸 직감적으로 눈치채고 돌려 말한 거야. 내일 애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어.” 그랬더니 남편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또 머릿속에 소설 한편 쓰셨군. 걔는 말 그대로 그냥 엄마가 힘이 없어 보여서 물어본 거라니까.” 다음날 진실을 알기 위해 아이에게 그 물음의 뜻을 넌지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딸의 대답. “뭐야. 그럼 엄마는 내 연주가 실망스러웠던 거였어?” 난 아직 엄마로서 성숙하려면 멀었나 보다.

작가 sempre80@naver.com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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