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 모여 취미나 취향을 공유하는 이른바 ‘살롱문화’가 유행이다. ‘취향관’ ‘문래당’ ‘문토’ ‘신촌살롱’ 등 살롱을 표방한 공간을 중심으로 지적인 사교의 즐거움에 눈 뜬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공연예술인 연극도 살롱에 스며들었다. 희곡을 읽는 낭독모임이 ‘연극의 맛’을 보는 취미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공연예술 관계자도 아닌 일반인들이 희곡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일 저녁, ‘신촌살롱’이란 문패를 단 서울 성동구의 한 카페에 사람들이 들어와 앉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목례를 하고 앉아 펼친 것은 핸드북 사이즈로 프린트 된 윤성호 작가의 희곡 <누수공사>. 윤 작가는 지난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중 하나인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을 쓴 작가 겸 연출자다.
<누수공사>는 2016년 국립극단 창작극 개발 프로젝트로 선정돼 당시 낭독공연만 했을 뿐 정식 공연은 이뤄지지 않은 작품이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 희곡을 읽으러 사람들이 모인 건 희곡전문출판사 자큰북스가 연 ‘리딩파티’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리딩파티는 일반인들이 희곡을 낭독하며 연극을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이다. 희곡 속 여러 배역을 맡아 직접 낭독해보고 배역에 맞는 목소리 배우로 선정되면 자큰북스의 팟캐스트 ‘자큰보이스’를 통해 녹음본이 송출된다. 희곡을 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도 나눌 수 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해리 자큰북스 대표는 “지난해 12월 삼일로창고극장에서 10일간 리딩파티를 진행했을 때 퇴근 뒤 매일 오는 직장인들이 계셨다. 직장생활의 고단함도 잊은 채 희곡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그분들의 얼굴을 보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2월15일 저녁 서울 성동구 신촌살롱에서 희곡전문출판사 자큰북스가 주최한 희곡읽기 모임인 ‘리딩파티’가 열렸다. 참가자들이 오세혁 작가의 <우주인>을 낭독중이다. 자큰북스 제공
처음엔 교과서 읽듯 평이하다
갈수록 몰입…표정 연기까지
“전공자와 달리 정제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캐릭터 나오기도”
■ 나이·직업·관계없이 취미로 대동단결 이날 리딩파티는 이름같은 간단한 자기소개도 없이 곧바로 시작됐다. 최근의 살롱문화가 상대의 직업이나 나이 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취미나 취향에 집중하는 방식 그대로다. 리딩파티 진행방식은 희곡의 배역이나 참가자 수 등에 따라 매회 달라진다. 희곡 속 등장인물이 참가자 수 15명보다 적은 이 날은 페이지를 세 부분으로 나눈 뒤 배역을 돌아가며 맡았다.
<누수공사>는 주인공인 남자 집으로 아랫집에 물이 샌다며 집주인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누수공사를 하는 동안 기술자, 낯선 남자, 옛 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남자를 방문하고 남자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기자도 기술자와 낯선 남자를 맡아 낭독에 참여했다. 팟캐스트용 녹음을 위해 참가자들이 스탠드 마이크를 중심으로 빙 둘러섰다. 서로 어색할 새도 없이 낭독이 시작됐다. 배역에 대한 분석,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읽으려니 낭독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역에 맞춰 대사를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지고 자신감이 붙었다. 조수를 다그치는 기술자의 대사가 처음에는 교과서를 읽듯 밋밋하게 나오더니 뒤로 갈수록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고 어느새 표정 연기까지 하며 몰입하게 됐다. 물론 긴 대사를 소화하다 다음 사람 대사까지 읽거나, 작품 내용에 빠져 내 순서를 놓치는 실수도 했다. 두 번째 배역이었던 자기 비하가 심한 낯선 남자는 앞서 낭독한 다른 참가자보다 말맛을 살리지 못했다. 이게 뭐라고! 읽을 차례가 돌아오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이 났다.
지난 1일 저녁 서울 성동구 신촌살롱에서 희곡전문출판사 자큰북스가 주최한 희곡읽기 모임인 ‘리딩파티’가 열렸다. 참가자들이 윤성호 작가(오른쪽 세번째)의 <누수공사>를 함께 낭독한 뒤 뒤풀이에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미영 기자
“다양한 캐릭터에 감정이입…
자연스레 자기 얘기 꺼내게 돼”
낭독낭패 ‘유튜브 살롱극’ 등
힐리·소통 이어가는 실험 활발
■ 캐릭터 감정이입 통해 치유되는 희곡 읽기 녹음이 끝나자 바로 뒤풀이가 이어졌다. 5만원의 회비를 내는 이날 모임은 와인과 간단한 안주가 제공됐다. 희곡 속 가장 탐나는 배역으로 꼽힌 집주인은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바뀌었다. 주인공 남자를 배려하는 교양있는 여성이었다가 자기 집만 아끼는 앙칼진 여성이 되기도 했다. 조수는 주로 “네” 밖에 대사가 없지만, 상대방의 대사 따라 억양과 톤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배역이었다. 윤성호 작가는 “전문 연기자들의 낭독공연에서는 제가 희곡을 쓸 때 생각한 인물과 비슷하게 연기했는데, 오늘 참가자들은 처음 읽으시니까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오더라. 이 인물이 이렇게도 읽히는구나 싶어 재밌었다”며 웃었다.
참가자들은 연기해본 소감, 참가하게 된 계기,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궁금증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나눴다. 연극연출을 전공하는 대학 새내기 김의리(22)씨는 연극 전공자로서 리딩파티가 궁금해 참가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이 희곡을 읽나 궁금했는데 와 보니 배울 게 많아요. 정해진 방식대로 읽는 전공자들과 달리 일반인들이 읽으니 정제되지 않고 신선한 느낌이 들면서 희곡을 쓸 때 한 줄 한 줄 낭비하지 않아야겠다고 느꼈어요.” 직장인 극단 경험이 있는 임지윤(가명, 28)씨는 거리감 있던 윤성호 작가를 재발견했다. “윤 작가 작품은 진지하고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읽어보니 일상적인 소재를 재밌게 풀어놓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목소리 연기일 뿐이지만 치유의 효과를 봤다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누수공사>에 앞서 진행된 오세혁 작가의 <우주인>, 이오진 작가의 <연애사>까지 세 번의 리딩파티에 다 참석한 직장인 박진숙(36)씨는 지난해 삼일로창고극장의 리딩파티도 참가했었다. 그는 “희곡을 읽으면서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 내가 평소 못하는 이야기를 대사로 하니까 힐링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 대표는 장소의 의미를 짚었다. “극장에서 낭독 모임을 했을 땐 작품 발표 같은 느낌이 났는데 살롱으로 오니 격식이 없어졌어요. 문화는 주장하면 더 어색해지기 마련인데 살롱으로 들어오니 쿨해지는 거죠.”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영화 후반작업 스튜디오에서 희곡읽기 모임인 ‘낭독낭패’ 회원들이 셰익스피어의 <멕베스>에 대해 얘기중이다. 김미영 기자
■ 곱창집 앞에서도 읽게 되는 ‘희곡 낭독의 맛’ 또 다른 희곡 읽기 모임인 ‘낭독낭패’는 유튜브에서 공유하는 실험도 하고 있다. 낭독낭패를 이끄는 전직 연극배우인 직장인 원유진씨는 2014년부터 ‘살롱극’(극장이 아닌 카페 등에서 무대장치 없이 하는 연극)을 진행해왔다. 녹화를 위해 모임 장소를 카페에서 영화 스튜디오로 옮기고, 모임 이름이 ‘희곡이 들린다’에서 낭독낭패로 변했을 뿐 희곡을 읽으며 연극을 가깝게 느껴본다는 취지는 바뀐게 없다. 모여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유튜브까지 시도하는 건 더 많은 사람이 희곡의 맛을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영화 후반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에 모인 회원들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함께 낭독했다. 월 4회 6만원인 회비를 내고 모이는 낭독낭패에서 읽는 작품은 단막극과 장막극, 고전과 현대 희곡을 오가며 회원들의 요청을 받아 정해진다. 낭독에 앞서 원씨가 작품을 설명했고, 낭독 중간에 활발한 토론도 이뤄졌다. 원씨는 “희곡은 읽다 보면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해 자연스럽게 자기 얘기들을 꺼내놓게 된다. 취향과 공감대가 맞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희곡읽기 모임인 ‘낭독낭패’는 낭독영상을 찍어 유튜브에도 올리고 있다. 마치 연극무대처럼 영상 배경을 깔아 낭독영상을 즐기는 재미를 더했다. ‘낭독낭패’ 유튜브 갈무리.
이들에게 ‘인맥’이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는 사람이다. 혼자 희곡을 읽는 게 재미없어서 찾아왔다는 20대 직장인, 연극을 잘 안 보는데 희곡을 읽는 건 또다른 재미가 있다는 50대 직장인,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쉴 때 낭독을 통해 자유를 맛봤다는 40대 전직 연극배우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관계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각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었다. 원씨는 “매번 뒤풀이가 길게 이어진다. 한번은 낭독을 채 마치지 못하고 뒤풀이 장소인 곱창집 앞에 줄 서서 기다리며 낭독을 하기도 했다”며 웃은 뒤 “이렇게 즐거운 희곡 읽기 모임을 확장하기 위해 고민을 늘 한다”고 했다.
연극배우 겸 연출자였던 김해리 대표도 희곡 낭독 모임이 연극의 저변을 넓히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막걸리가 어울릴 것 같은 연극을 좋은 공간에서 와인을 즐기며 향유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회비가 비싸다는 의견도 있고, 큰 흥행이 되진 않았지만 우리가 정한 방향이 맞았다는 걸 리딩파티를 하며 확인했어요.”
김 대표와 함께 리딩파티를 주최한 신촌살롱의 원부연 대표는 살롱과 만난 공연예술의 확장성에 기대를 갖고 있다. “요즘 직장인들은 자신의 취향과 경험을 위해 지갑을 여는 걸 아끼지 않아요. 희곡 낭독모임은 연기를 해보고, 작가와 작품에 관해 얘기하고, 목소리 배우로 데뷔해보는 경험을 제공하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나누면 힐링도 되고요. 살롱이 일반인들에겐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예술가들에겐 공동작업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공간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