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해자에서 최근 출토된 방패모양 목제품. 실물 방패가 온전한 모양새로 출토된 것은 역대 처음이다.
신라의 천년 궁궐터인 경주 월성은 문화재의 거대한 화수분이다. 2015년 이래 국내 최대규모의 발굴조사가 이어지면서 당대의 사회 생활상을 일러주는 희귀유물들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이번에는 1500년전 병사들이 썼던 방패 실물과 의례에 썼던 나무배 모형, 지방관인 당주(幢主)와 여러 곡물 이름 적힌 목간(나무쪽 문서)이 세상에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최근 월성을 둘러싼 방어용 도랑인 해자 바닥을 정밀조사한 결과 의례용품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작은 배모양 목제품과 4~5세기 가장 온전한 형태의 실물 방패 2점, 소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지방관의 보고용 문서인 목간 1점 등을 확인했다고 2일 발표했다.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소형 나무배 모형을 세척중인 모습. 불과 관련된 의례에 썼던 용품으로 추정된다.
배모양 목제품은 현재까지 국내에서 확인된 모형 배로는 가장 오래된 유물로 판명됐다.
통나무배보다 발전된 형태로 실제 배와 같이 선수(뱃머리)와 선미(배꼬리)가 분명하게 표현된 준구조선(準構造船)의 형태를 띠고있다.
몸체 안팎에서 불에 그슬리거나 탄 흔적이 확인돼 불과 관련된 의례용일 것으로 보고있다.
약 5년생의 잣나무류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제작 연대는 4세기~5세기 초(350~367년 또는 380~424년)로 추정된다.
형태를 정교하게 모방하고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왕실이나 최고위 계층을 위한 유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동아시아권에서 고대 배의 축소 모형은 일본에서 약 500여 점이 출토된 사례가 있다. 월성에서 출토된 모형 배는 일본 시즈오카현 야마노하나 유적에서 나온 5세기 일본 고훈시대
중기의 모형 배와 뱃머리, 뱃꼬리,
상부구조물인 현측판의 표현 방법 등이 빼어닮았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배를 만드는 방식을 놓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월성 옆 월지(안압지)에서는 지난 1970년대 유적 발굴당시 이번에 발굴된 배 모형과 비슷한 모양의 실제 나무배가 출토된 바 있다. 이 배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복원된 채 전시되고 있다.
함께 나온 4~5세기께의 나무 방패는 신라 병사들이 썼던 유일한 실물로 추정된다. 온전한 모양새로 출토된 사례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2점 모두 해자의 가장 낮은 바닥면에서 출토됐는데, 하나는 손잡이가 있고 하나는 없다. 몸체 재질은 두점 모두 잣나무류로 판명됐으나, 손잡이는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면에는 날카로운 끌 같은 도구로 기하학적인 모양의 밑그림을 그리고 붉은색?검은색으로 채색한 흔적이 보인다. 또 일정한 간격의 구멍들이 보이는데, 실 같은 재료들로 옭아매어 엮은 흔적으로 추정된다. 연구소쪽은 실제 방어용 무기로 쓰거나 수변 의례를 벌이면서 의장용으로 세워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있다.
목간도 흥미를 모으는 출토품이다. 3면 전체에 먹글씨로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지방관인 당주(幢主)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적고있다. 단양 신라 적성비 등의 6세기 신라 금석문에 나오는 지방관 명칭인 당주가 목간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과 벼·조·피·콩 등의 곡물 이름이 기록되고, 그 부피를 일(壹), 삼(參), 팔(捌)과 같은 갖은자(같은 뜻을 가진 한자보다 획이 많은 글자로 금액이나 수량의 변조를 막기위해 쓴다)로 표현했다는 점 등이 주목된다. 신라의 갖은자 사용 문화가 통일 이전부터 있었음을 일러주는 문자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해자 안팎에서는 기슭의 목제 구조물과 씨앗 등 다양한 건축 생활 관련 유물들도 다수 확인됐다. 해자 기슭의 목제 구조물은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기위한 시설로 해자 연못 북벽에 만들었다. 해자 바닥을 파서 1.5m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는 판재로 이었다.
나무기둥의 최대 높이는 3m이고 최대 7단의 판재가 남아 있어, 대규모 토목 공사가 삼국통일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라의 목제 구조물 전체가 확인된 최초의 사례로서, 당시의 목재 가공 기술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근거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조사팀은 해자 내부 바닥흙을 모아 1㎜이하 알갱이들까지 체질하면서 63종의 신라시대 씨앗과 열매를 확보하는 성과도 올렸다. 국내 발굴조사 상 이렇게 많은 수량의 고대 씨앗과 열매를 확보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아울러 해자 주위에 분포한 식물 자료 검토를 위해 화분(꽃가루) 등을 분석한 결과 해자 연못 위에 서식했던 가시연꽃, 물속에 살았던 수생식물, 해자 외곽 소하천(발천)변의 느티나무 군락 등의 흔적도 파악해 당시 경관을 복원할 근거도 확보했다. 연구소 쪽은 “물의 흐름?깊이?수질을 알려주는 당시의 규조(물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를 분석하여 해자에 담겼던 물의 정보를 분석중”이라면서 “이런 식생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신라인들이 가시연꽃이 가득 핀 해자를 보며 걷고, 느티나무숲에서 휴식을 취했을 5세기 무렵 신라 왕궁의 풍경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당시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도 나왔다. 6개월 전후의 멧돼지 뼈가 26개체나 확인돼 신라인들이 어린 멧돼지를 식용이나 의례용으로 선호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라 왕경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던 곰뼈는 현재까지 15점(최소 3개체)이 나왔는데, 앞발과 발꿈치 등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활용한 것이 흥미롭다. 이외에도 2~3세기부터 분묘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는 수정이 원석 상태로 나왔고,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성된 3호 석축해자의 바닥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사용된 흔적이 있는 쇠도끼인 단조철부가 36점이나 쏟아져나왔다.
신라시대 경주월성 해자 연못과 부근의 식물 분포를 복원한 가상그림. 연못에는 가시연꽃이 떠있고, 바깥에는 느티나무 군락이 펼쳐진 모습이 보인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은 경주 월성 유적 발굴조사는 22만 2천㎡에 달하는 성벽(에이(A)지구)과 건물터(시(C)지구), 해자를 대상으로 진행중이다. 유적의 핵심인 시지구에서는 건물터를 비롯한 내부 공간 일부와 삼국~통일신라 시대 층위별 유적들의 얼개가 다량의 유물과 함께 확인됐으며, 월성 해자는 성의 방어와 외부 조경(造景)의 구실을 하면서
다양한 의례도 이뤄진 공간이었음이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월성 발굴조사 성과는 5일부터 6월2일까지 열리는 ‘한성에서 만나는 신라월성’ 특별전(서울 방이동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