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는 2015년부터 매년 세월호 기획공연을 올리고 있다. 왼쪽부터 2015~2018년 세월호 기획공연 포스터와 올해 `제자리'를 주제로 한 세월호 공연 휘장이 걸린 극장. 혜화동1번지 제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중심지에서 약간 비켜난, 혜화동로터리 부근에 자리한 소극장이다. 지하에 있는 극장 좌석은 최대 50석. 건물 옆 주차장을 매표소로 써야 할 만큼 좁은 곳이나, 규모를 초월해 당대를 대표하는 연출가들이 이곳을 거쳤다. 1994년에 국내 처음으로 연출가 동인제를 채택해 1기 동인인 기국서·이윤택을 시작으로 박근형·이해제·양정웅 등 40명가량의 쟁쟁한 연출가를 배출했다. 25년이 된 올해는 지난해 말에 꾸려진 7기가 활동 중이다. 동인이 되면 극장장이 되어 다음 기수에게 넘겨줄 때까지 극장을 운영한다.
상업적인 연극을 배제하고 실험적인 연극을 하는 혜화동1번지 동인들에게는 2015년부터 매해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세월호 기획초청’ 공연이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해에 활동하던 6기 동인인 구자혜·김수정·백석현·송경화·신재훈·전윤환 연출은 세월호 1주기인 2015년에 <오늘의 4월16일, 2015. 8>을 비롯해 연극 9편을 선보이는 ‘세월호’ 기획공연을 시작했다. 신재훈 연출은 “세월호 참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할 때였는데 주제의 동시대성을 피할 수 없었다”며 “연극계가 세월호를 다루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시작한 게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시작할 때만 해도 “세월호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돼 연출가들이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는 기획공연은 해가 바뀌어서도 이어졌다.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탓이다. 2016년 ‘세월호 이후의 연극 그리고 극장’(<국가에게 묻는다> 등 8편), ‘세월호 2017’(<검은 입김의 신> 등 8편), ‘2018 세월호’(<벡사시옹+제10층> 등 10편)로 이어지면서 6기 동인들은 4년간 세월호와 연관된 작품 35편을 선보였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1년 차에는 죽음에 대한 애도를, 2년 차에는 책임에서 발뺌하는 정부와 유족들이 모욕당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담는 식으로 세월호 문제에 다양하게 접근해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혜화동1번지 6기 동인들은 2015년부터 세월호 기획공연을 매년 선보였다. 뒷줄 왼쪽부터 백석현, 김수정, 앞줄 왼쪽부터 전윤환, 송경화, 구자혜, 신재훈 연출가. 혜화동1번지 페이스북 갈무리
2017년부터는 세월호 유가족들로 구성된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이 자체 공연을 함께 올렸다. 아무리 연출가들이 노력해도 “이분들의 진실성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였다. 신재훈 연출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인들끼리 다음 기수를 뽑을 때까지 세월호 기획공연을 계속해보자고 했다”며 “동인 활동을 끝낸 지금도 세월호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 꾸려진 7기 동인 김기일·신재·송정안·이재민·임성현·윤혜숙 등 6명의 연출가도 지난 4일 세월호 기획공연을 시작했다. 주제는 ‘제자리’다. 제자리의 사전적 뜻과 결부해 “누군가는 제자리(1.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고, 진상규명을 향한 길은 여전히 제자리(2. 위치의 변화가 없는 같은 자리)에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혜화동1번지의 최주희 피디는 “세월호 기획공연을 6기에서 시작했고,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5년이 흘렀기 때문에 새로 꾸려진 7기들은 기획공연을 이어서 올려야 하나 처음엔 고민했다”며 “의무감으로 ‘해야 한다’가 아니라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올해 세월호 공연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혜화동1번지 7기 동인인 이재민(왼쪽부터), 송정안, 임성현, 윤혜숙, 김기일, 신재 연출가와 최주희 피디. 혜화동1번지 제공
첫 작품은 이재민 연출의 <겨울의 눈빛>(14일까지)이다.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사고가 난 상황을 가정한 작가 박솔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60분간 낭독공연을 펼친다. 원전 사고와 직접 관계는 없으나 그렇다고 무관심하게 지내지도 못하는 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참사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현대인들의 무덤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재민 연출은 “세월호 이후에도 반복되는 여러 참사를 보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움, 무관심, 무기력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임성현 연출은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중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엮은 동명 연극(18~28일)을 올린다. 2009년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2016~17년 촛불탄핵 등 수많은 사건을 배경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혁명과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보여줄 계획이다. 김기일 연출은 평범한 사람이 어떤 사건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겪은 뒤 빚어지는 풍경을 그린 <아웃 오브 사이트>(5월2~12일)를, 신재 연출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고통>을 원작으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들의 곁에 있는 연대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바람 없이>(5월23일~6월2일)를 공연한다. 송정안 연출의 <어딘가에, 어떤 사람>(6월6~16일), 윤혜숙 연출의 <더 시너>(6월20~30일)도 준비 중이다.
혜화동1번지의 2019년 세월호 기획공연 ‘제자리’ 포스터. 혜화동1번지 제공
기획공연의 마무리는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세번째 작품인 <장기자랑>(7월4~7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영이가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준비하면서 빚어지는 일을 다룬다. 김태현 연출은 “세월호라는 세 글자가 무겁고 진중하기 때문에 가족극단은 대중이 쉽고 편안하게 웃으며 세월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코믹극을 해왔다”며 “가족들에겐 잊히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는데 혜화동1번지가 대학로에서 세월호를 테마로 지속해서 다뤄주는 걸 값지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소연 평론가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서명한 이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 박근혜 정권의 공공극장들이 동시대 문제를 외면하고 침묵할 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는 세월호 기획공연을 했고, 연우소극장은 블랙리스트 사태에 반발한 연극계 페스티벌인 ‘권리장전’을 무대에 올려 공공극장이 해야 할 역할을 했다”며 “특히 혜화동1번지는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을 연극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놓고 연극인들이 플랫폼을 만들어 공동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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