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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세상과의 불화에서…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록 2019-04-21 12:18수정 2019-04-21 19:39

[전시장서 만난 음악인 정태춘]
올 초 시작된 ‘40 프로젝트’ 전시
‘막글’이라 폄하하는 붓글 밑으로
현대 문명 비판하는 아픈 덧글이

“인간 문명 정당성에 동의 안 해
작품 빌어 스스로에게 ‘여길 떠나라’
패잔 유배지에서라도 깃발 흔들고파”
정태춘씨가 18일 오후 데뷔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가다>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사회와 삶을 바라보며 느낀 생각을 노래가 아닌 화폭에 담은 ‘붓글’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태춘씨가 18일 오후 데뷔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가다>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사회와 삶을 바라보며 느낀 생각을 노래가 아닌 화폭에 담은 ‘붓글’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군부 권력, 시장 손에 들어가 버려
누구 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
앞으론 조용하게 소진되자고 느껴”

“요즘 이 사람이, 자기가 아이돌 못지 않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고 말해요.”

가수 박은옥씨가 남편인 가수 정태춘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 18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정태춘씨를 인터뷰한 뒤에 박은옥씨가 합류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정태춘(이하 존칭 생략)도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부부의 가수 활동 40주년을 기념하는 ‘40 프로젝트’가 올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정태춘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인터뷰를 했고, 두 개의 텔레비전 음악 방송 특집에 출연했으며, 생방송 뉴스에 나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다 잊혀진 사람인데 왜들 이러실까 싶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40 프로젝트’는 기념 음반 발매, 가사집을 겸한 노래 에세이와 시집 등 출판, 전국 순회 공연, 전시, 학술 심포지엄 등 다채로운 형식으로 올해 내내 이어진다. 세종미술관에서는 12일부터 29일까지 ‘다시, 건너간다’라는 이름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강요배·이철수·임채욱·홍성담 등 미술인 50여명이 참여한 트리뷰트 전시와 정태춘 자신의 ‘붓글’ 전시가 그것이다. 전시장에서는 거의 매일 정태춘 자신이 참여하는 토크쇼와 후배 가수들 공연, 강연 등이 이어진다. 18일 오후 인터뷰도 전시장에 딸린 행사장에서 공개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됐다.

토크쇼에 앞서 정태춘은 관람객 십여명을 안내하며 자신의 붓글 작품을 설명했다.

“공부 삼아 천자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시가 나오더군요. 그런데 한시로는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니까 한글로 바꾸게 되었어요. 처음엔 펜글씨로 시작했는데, 손에 문제가 생겨서 붓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붓글’의 탄생이다. 서예나 캘리그라피를 따로 배운 적은 없다. 그저 내키는 대로 썼다. “글씨 자체는 막글이지만, 그것으로 내 얘기를 했더니 어떤 평론가는 현대판 문인화로 볼 수 있다는 말도 하더군요. 허허.”

가령 이런 식이다. 스스로는 막글이라 폄하하지만 멋들어진 회화체로 ‘노래’라는 굵은 붓글씨를 쓰고는 그 아래에 얇은 글씨로 덧붙였다. “마음이 부르지 목이 부르나”. 글씨 옆에는 연한 먹선과 붉은 점으로 기타를 그려 넣었다. 제목 또는 주제에 해당하는 큰 글씨와 그것을 부연설명하는 작은 글씨로 된 문장이 붓글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작년 여름에 붓글을 집중적으로 썼어요. 이 작품을 비롯해 ‘노래’에 관한 몇 작품을 쓰고 나니까 ‘아, 이제 붓글을 나의 작업으로 삼을 수 있겠구나’ 싶더군요. 결국 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 거죠. 노래를 만들지 않게 되면서 가죽 작업도 하고 사진도 찍어 봤지만, 역시 나는 텍스트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정태춘씨가 18일 오후 데뷔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가다>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미술가 임채욱의 작품 ‘정박 1901’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태춘씨가 18일 오후 데뷔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가다>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미술가 임채욱의 작품 ‘정박 1901’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오서오담’(吾書吾談)이라는 작품이 그런 그의 생각을 담았다. “나는 평생 나의 이야기를 해 왔다. 그것이 또 누군가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붓글 작품들은 주제 또는 소재별로 ‘노래’ ‘마포한담’ ‘‘강촌농무’ ‘반산’(反産)으로 구획이 나뉘어 걸렸다. ‘깃발’이라는 작품의 덧글이 아프다. “깃발만 보면 흔들고 싶어진다. 여기 패잔의 유배지에서라도 말이다.” 작품 앞에 선 정태춘이 제 발이 저린 듯 설명했다. “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기지 못했어요.” 그가 졌다고 말하는 싸움의 대상은 무엇일까. ‘산업주의’라는 작품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경쟁과 차별의 뜨거운 채찍. 지지 마라, 비참하다. 자선은 반체제적이다.”

마지막 구간에는 그가 2012년에 연 사진전 <비상구>에서 선보였던 사진들에 붓글을 곁들인 작품 넷이 걸렸다. 아스팔트 위에 싹을 틔운 풀 한 포기를 찍은 사진에 그는 이런 글을 보탰다. “나무여, 풀들이여 이제 떠나라 옛 오아시스 목마르다. 메마른 바람에 꽃씨 되어 새로운 오아시스 또는, 신선한 대초원의 별을 찾아 이제 여길 떠나라.”

“산업주의와 시스템, 정치,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작품들은 나와 세상과의 불화에서 나온 것이죠. 이 행성에서 이루어진 인간 문명의 정당성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풀을 보고 떠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게 하는 말이죠. 과거 군부가 쥐고 있던 권력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시민에게 넘어온 게 아니라 시장 손에 들어가 버렸어요. 생산성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고, 누구 하나 그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죠.”

정태춘씨가 18일 오후 데뷔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가다>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자신의 붓글 작품 ‘뚝 터졌다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태춘씨가 18일 오후 데뷔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가다>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자신의 붓글 작품 ‘뚝 터졌다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그는 새로 낸 시집 <슬픈 런치>의 ‘시인의 말’에서도 “열차는 달리고 나는 거기서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라며 현대 문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산업주의’에 맞서는 목소리와 움직임을 결집하면 열차를 멈추거나 적어도 그 속도를 줄일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테러에 의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수학 교수 출신 테러리스트 유나바머 얘기를 꺼냈다. “진짜 변화는 문제가 누적될 대로 누적되고 썩을 대로 썩어서 스스로 폭파하면서 이루어질 것 같다”며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로는 그런 변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방송 공개 음악방송인 <열린음악회>에서 그가 노래 ‘5·18’(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을 부를 때 객석에서는 눈물을 훔치며 오열을 참는 모습들이 보였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울었다는 말도 들었다. 지난 13~14일 제주에서 1200석 규모 공연장을 거의 채운 채 진행된 정태춘·박은옥 콘서트에서도 우는 관객이 여럿이었다고 했다. 노래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경험이라 하겠는데, 정태춘은 40주년 기념 음반에 새 노래 두 곡을 싣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야속하고 안타까웠다. 재능은 물론 개인의 것이지만 공적 자산인 측면도 있고 사회적 책임도 있지 않겠냐고, 어깃장 부리듯 질문을 던져 보았다.

“스스로가 보기에는 그 재능이란 것도 많이 부족해요. 좀 더 큰 상상력, 거침없는 행동양식 같은 걸 제가 가졌다면 전혀 다른 예술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었을 텐데,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간 이뤘던 성취들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요. 또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사회 전체 또는 시장 안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저는 재능의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시작한 순회 공연은 4월30일~5월7일 서울 공연을 비롯해 창원, 강릉, 대전, 부산 등 11월까지 전국을 돌며 이어진다. 지난해 말부터 촬영을 시작한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가 내년 6월께 개봉하는 것으로 ‘40 프로젝트’ 일정은 공식 마무리된다. 그 이후 정태춘의 계획은 무엇일까.

“40 프로젝트는 본래 지난 40년을 기록으로 남겨 보자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판이 커졌어요. 내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닌데, 좀 조절을 못한 거죠.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는, 예전처럼 생계를 위한 노래는 계속 하겠지만, 언론하고의 접촉도 다 끊고 세상과의 불화도 좀 덜 노출하면서 가족들과 조용하게 지내면서 소진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붓글 작업도 그만두고 싶은데, 내가 과연 내 말 자체를 완전히 닫아 버릴 수 있을까 의문이긴 해요. 붓글 작업을 계속 한다면, 아마 세상과의 불화가 아니고 다른 쪽 이야기들이 튀어나오겠죠.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에 대한 연민 이런 것들 말이죠.”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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