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종로구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배우 윤석화가 출연하는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돌꽃컴퍼니 제공
“제일 보람 있었던 건 작품에 대한 열정이 있는 후배들을 후원한 거예요. 공간을 내주고 제작비를 지원해주면 진심을 담은 작품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할 만큼 한 것 같아요.”
배우 윤석화(63)가 무대 위에서 눈물을 훔쳤다. 17년간 설치극장 정미소를 운영하며 행복했던 기억을 얘기해달라는 질문을 받은 뒤였다.
대학로에서 실험적인 작품을 주로 올렸던 ‘대학로의 터줏대감’ 정미소가 새달에 문을 닫는다. 폐관작은 2002년 개관작이기도 했던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6월11~22일)다. 16일 정미소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극장 운영주이자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윤석화는 “건물주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건물이 매각되면서 더 이상 운영이 어렵게 됐다”며 “소극장 운영은 늘 어려움이 많다. 마음이 약해서 내려놓지도 못하다가 이참에 내려놓게 돼 감사하면서도 섭섭하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정미소는 원래 3층짜리 목욕탕 건물이었다. 윤석화와 건축가 장윤규가 쓸모 잃은 낡은 공간을 예술공간으로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해 건물을 개·보수하고 극장으로 만들었다.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는 의미를 담아 ‘정미소’로 이름 지었다. 윤석화가 한때 발행인이었던 월간 <객석> 사무실, 언론인 김어준이 운영하는 카페 ‘벙커1’이 같은 건물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2석 규모의 작은 극장엔 실험적이고 개성있는 작품이 많이 올랐다. 인간 복제 문제를 제기한 연극 <넘버>(2006)를 비롯해 안톤 체호프가 쓴 단막극 10개를 묶은 <14人(in)체홉>(2017),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진 중년부부 이야기 <타클라마칸>(2018) 등이 정미소에서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이날 제작발표회의 사회를 맡은 배우 이종혁은 “제가 신인이던 2003년에 이 극장에서 박정자 선생님과 연극 <19 그리고 80>을 했었다”면서 “저를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에게 기회를 주고 꿈을 꾸게 해준 극장”이라며 폐관을 아쉬워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설치극장 정미소. 돌꽃컴퍼니 제공
윤석화는 “조용히 문을 닫을까 하다가 관객 여러분과 마지막으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작품을 골랐다”며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년 하반기 영국 런던에서 공연한다. ‘여러분 사랑 덕분에 공연하게 됐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영국 극작가인 아널드 웨스커의 작품이다. 미혼모이자 가수인 45살의 여자가 사춘기에 접어든 12살 딸에게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편지로 쓰는 내용이다.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가 연출하고 윤석화가 출연해 1992년 소극장 산울림에서 세계 초연됐다. 당시 관객들의 호응이 높아 10개월간 공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런던 공연을 위한 오픈 리허설 형식으로 이뤄진다. 현지에서 영어로 하는 공연을 한국어와 섞어 드레스 리허설(의상·분장을 갖추고 최종적으로 하는 무대 연습) 개념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연극 <레드>, 뮤지컬 <시카고> 등을 만든 김태훈 연출가가 연출을 맡았다. 김태훈은 “초연을 임영웅 연출가가 맡아 부담이 됐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기로 했다”며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것처럼 느꼈다가 딸에게 편지를 쓰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한다. 그런 부분에 관객이 공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화는 “예전에는 아빠의 정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아빠의 존재가 나온다. 삶이라는 부피가 조금 더 두꺼워졌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많은 것을 내려놔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는 윤석화는 이날 “페이드아웃”(점점 사라짐)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극장 폐관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자주 울컥한 그는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 않나. 이제는 아름답게 페이드아웃 해서 배우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떠오르는 태양도 아름답지만 석양도 또다른 아름다움이 있잖아요. 나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배우와 사람으로 남으면서 후배들을 위한 좋은 배경이 되고 싶어요.”
금발머리를 하고 감색 드레스를 입은 윤석화는 이날 연극 속 테마곡인 ‘잇 워즈 아워 타임’을 시연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듯 홀로 무대에 서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설치극장 정미소를 닫게 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기억하겠지 기억할 거야 잊지 않을 거야/ 우리들의 시간이었음을/ 그 누구도 우리의 시간을 가져갈 수 없어/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흔들 수 없어.”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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