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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근현대 미술 품은 ‘국립박물관의 혁신’

등록 2019-05-29 18:30수정 2020-12-27 18:08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배기동 관장, 대중적 감수성 맞춰
사상 처음으로 현대미술가 전시
근대 서화가 안중식 100주기 조명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전시회에 나온 김승영 작가의 작품.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전시회에 나온 김승영 작가의 작품.
“지난 60년간 죽은 것들만 갖고 전시했어요. 살아서 말하는 사람과 기획전 짠 건 사실상 처음이죠.”

지난달 29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특별전시실에서 만난 최선주 연구기획부장의 말이다. 그는 멋쩍은 듯 전시장 안쪽의 스피커 설치작품을 올려다보았다. 10m 이상의 높이로 촘촘히 쌓아올린 700여개의 오디오 스피커 탑이다. 탑 사이 감실처럼 우묵한 공간엔 희로애락 표정을 품은 600~700년 전 고려 나한상 29분이 자리를 포개고 앉아 있었다. 사운드 설치작품으로 잘 알려진 김승영 작가가 내놓은 신작이다.

이 작품은 지난달 말부터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6월13일까지)의 주요 작품중 하나다. ‘오백나한’전은 요즘 문화재계보다 미술판에서 더욱 화제를 모으는 전시다. 2001년 강원도 영월 창령사에서 발굴된 인간적인 풍모의 나한상 유물 88점을 세심하게 재조명하는게 큰 뼈대인데, 구성 자체에 현대미술 요소들이 대폭 녹아들었다. 좌대에 올려진 나한상 한점 한점을 각각 조명을 비추면서 부각시킬 뿐아니라 안쪽의 안쪽의 석굴암 전실 같은 스피커설치 벽에서는 바람 소리, 비질하는 소리 등을 함께 울려 나온다. 나한상이 깃들인 ‘사운드탑’을 탑돌이 하듯 돌아가면 마음이 정화되고 편안해진다는 반응들이 많다.

시각과 청각 촉각 등이 공감각적으로 어우러진 ‘오백나한전’은 김 작가가 박경은 박물관 학예사와 올초부터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협업전이다. 현대미술가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상 처음 전시의 주인공이 되어 내놓은 신작전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않다. 전시내용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국립춘천박물관 기획전으로 먼저 선보인 바 있다. 이미 그때부터 현대미술과 콜라보(협업)가 잘된 전시라고 입소문이 났다. 춘천 전시가 지난해 국립박물관 ‘올해의 전시’로 선정되자 현대미술적 성격을 대폭 강화한 ‘버전 2’를 중앙박물관 특별전으로 올린 것이다. 개막식 날 전시를 봤다는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는 “생동감 없이 진열장만 존재하던 박물관 공간에 소리와 흙, 벽돌 등 현대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가면서 보는 방식에 역동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오래 전부터 현대미술 협업을 해온 국외 박물관들처럼 이런 시도가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에 나온 김환기의 1953년작 <돌>.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갔던 국립박물관에서 제1회 현대미술작가전을 열었을 때 출품한 뒤 기증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 사실상 처음 일반 공개됐다.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에 나온 김환기의 1953년작 <돌>.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갔던 국립박물관에서 제1회 현대미술작가전을 열었을 때 출품한 뒤 기증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 사실상 처음 일반 공개됐다.
박물관 쪽은 국립미술관 영역도 치고 들어갔다. 역량과 수장품의 한계 때문에 미술관들이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근대 서화 대가 안중식의 사거 100주기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6월2일까지)를 열고 있다. 전시는 3·1운동 100주년과는 또다른 의미를 지닌 이 땅 미술판의 100년 전 기점을 여러 갈래로 톺아본다. 안중식, 조석진 등 동세대 화원 작가들과 김옥균, 박영효, 김진우, 오세창 등의 우국지사 문인들, 고희동, 김은호, 변관식, 이상범 등 후속 세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두루 망라하면서 당대 잡지, 단행본, 신문 등의 출판미술까지 짚고 있다. 주제를 천착하거나 강렬한 메시지를 표출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역사적 맥락의 비장품들을 재구성한 내공이 엿보인다. 일본 사노시박물관의 김옥균, 박영효, 오세창, 황철 같은 구한말 문인들의 숨은 글씨, 서화 들을 가져온 것이나 수장고를 뒤져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나오는 근대 대가들의 회화와 김환기가 53년 피난기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들까지 공개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고대 고전 시기의 박물관이 근현대미술의 시대 영역과 장르적 특성까지 수용하는 흐름은 서구의 뮤지엄에서는 수십년전부터 대중의 미감과 취향을 내세워 보편화했다. 지금도 비엔날레가 한창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가면, 명문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바로크식 장식공간 한켠에 독일 현대거장 바젤리츠의 거꾸로 매달린 인물 회화가 내걸려 있다. 저 유명한 피렌체의 대명사 우피치 미술관 전시장에는 철블록으로 인체형상을 구성한 안토니 곰리의 작품과 로마시대의 여체 대리석상이 나란히 전시중이다. 이런 국외 사정을 감안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의 변화는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대중적 감수성에 맞는 전시기획틀의 혁신을 주문해온 배기동 관장의 정책 몰이가 다급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진행되어온 배경이다. 배 관장은 “이제 더이상 기존의 보수적 정체성에 안주할 수 없다. 대개 1910년으로 고정됐던 기존 박물관 전시 기획의 하한 연도를 확 내리고 현대미술 쪽과도 적극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근대기 유물이나 작품들도 100년 뒤에는 박물관의 주시 대상이 된다는 점을 감안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론이다. 실제로 그는 오랜 지인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올초 취임하자 곧장 만나 수장품 교환 전시와 연계 기획 등을 강화하기로 단박에 의견을 모았다. 1970년대말 호암미술관 기획자 시절부터 같이 일하며 교분을 쌓은 사이란 점이 한몫을 했다고 한다.

지난 2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교육동에선 두 관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기관의 큐레이터들이 처음 워크숍을 꾸렸다. 공생 방안에 대해 종일 열띤 토의를 펼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다. 다음달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서 두 기관 워크숍이 다시 열린다. 유리 진열장 전시에 수십년을 안주해온 박물관으로서는 간단치않은 도전을 시작한 셈이다. 하반기 대가야전 등의 국책 과제 대형 전시를 앞둔 박물관 쪽이 경계를 가로지르며 터놓은 신선한 탐구들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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