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작가가 생전에 서울 동선동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자소상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의 명문 미술전문학교인 무사시노미술대학은 2009년 개교 80주년을 맞아 학교를 대표할 작가 한명을 선정했다. 엄격한 추천과 심사를 거쳐 무사시노미대가 배출한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권진규(1922~1973년)가 뽑혔다. 구로카와 히로타케 교수(무사시노미대 조각과)는 당시 권진규를 추천하면서 “스승(시미즈 다카시)은 부르델을 맹주로 하는 정규군이었지만, 제자 권진규는 맹약이 실효된 고독한 유격대로서 1960년대를 반시대적으로 살았다”며 작가의 독창성을 높게 평가했다. 무사시노미대는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및 대한민국현대미술관과 공동 주최로 도쿄와 서울에서 ‘권진규전’을 열었다. 권진규의 작품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미술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현대 한국 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들이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46년이 지나도록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권진규가 남긴 조각과 유화, 데생 등 700여점을 놓고 유족들과 현 소유자가 소송을 벌이고 있다. 유족인 권경숙(권진규의 여동생)과 허경회(권경숙의 아들)는 지난 2월 강원도 춘천의 옥광산인 대일광업의 대표이사 김현식을 상대로, 대일광업 쪽에 양도했던 위 미술품들을 유족에게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일광업에서 분할된 대일생활건강(대표 김현식)에 대해서도 지난달 같은 소송을 냈다. 춘천지방법원에서 현재 두 소송이 진행 중이다. 원고(유족) 쪽은 대일광업이 작가의 위상에 맞는 ‘권진규미술관 건립’이라는 애초 약속을 위반했기에 작품을 돌려받겠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피고(대일광업) 쪽은 약속 위반이 아니라며 돌려주지 않겠다고 맞서고 있다.
“작품 복제하자” 발언 진실은?
양쪽은 2015년 5월 ‘권진규미술관 건립 합의서’를 작성했다. 미술관 건립에 대해서는 두가지 사항을 담고 있다. “2015년 말까지 춘천시 동면 월곡리에 ‘권진규미술관’을 건립해 운영”하며, “2020년 말까지 별도의 독립된 건물을 새로 건립해 ‘권진규미술관’을 확장 이전한다”는 내용이다. 즉 2020년까지 권진규미술관을 별도로 짓되 그동안은 임시 미술관을 마련해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 미술관의 콘텐츠인 작품 700여점을 유족들이 대일광업에 양도하고 갑(대일광업)은 을(유족)에게 40억원을 지급하기로 합의서에 명시됐다. 처음엔 합의서가 잘 지켜졌다. 대일광업은 그해 말 월곡리에 있는 대일광업의 달아실미술관 2층을 ‘권진규미술관’으로 만들어 작가의 귀중한 작품을 전시했다. 미술관에는 테라코타(점토로 만든 형상을 불에 구워 제작하는 방식)로 만든 자소상(자신의 모습을 빚은 조각) 3점과 건칠(모시나 삼베 위에 옻칠을 하는 방식)로 만든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등 권진규의 주요 작품들이 전시됐다. 애초 장난감과 로봇 박물관으로 출발했던 달아실미술관은 곧 춘천의 문화 명소로 떠올랐다.
지난 1월 초 강원도 춘천에 있는 달아실미술관 1층 현관에 ‘권진규미술관’ 휴관을 알리는 게시판이 붙어 있다. 이즈음 권진규의 작품 700여점은 빌린 돈에 대한 담보로 한 대부업체의 창고로 넘어갔다. 권진규기념사업회 제공
권진규는 1973년 5월4일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짧은 문구를 친구 두명에게 남기고는 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언덕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1959년 일본에서 귀국한 권진규는 직접 지은 아틀리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비사교적이기도 했지만, 당시 미술계 주류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일본도 그랬지만, 당시 한국 미술계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에서도 서구에서 유행했던 추상작품이 대세였다. 그러나 권진규는 시대적 유행과 달리 리얼리즘에 기반한 구상작품에 몰두했다. 교과서에 실린 <지원의 얼굴>(1967·테라코타) 등이 대표적이다. 권진규는 생전에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다. 한국 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돼 있다. …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학생들이 불쌍하다”(<조선일보> 1971년 6월20일)고 말했다.
유족과 대일광업 사이에 균열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6월이었다. 대일광업은 달아실미술관의 2층에 있던 권진규미술관을 닫고 1층의 한쪽 공간으로 축소했다. 기존 공간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권진규기념사업회 회장이기도 한 허경회는 사전협의가 전혀 없이 미술관을 축소한 것은 합의서 정신에 대한 위반이라고 느꼈다. 두달 뒤인 지난해 8월 허경회는 대일광업 대표이사인 김현식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현식은 권진규 작품의 복제를 제안했고, 허경회는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권진규가 죽기 전에 스스로 석고 형틀을 다 부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사후 복제 금지’가 작가의 뜻이라고 유족들은 평소 생각해왔다. 이에 김현식은 “그러면 작품을 도로 가져가라. 1원 한 푼도 웃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허경회는 며칠 뒤 ‘작품을 돌려받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대일광업에 보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작품 복제와 관련해 대일광업 쪽은 법원에 낸 답변서에서 “외부에 반출하여 전시하는 경우 손상에 대비하여 복제품을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지 복제품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었다”고 밝혔다. 또 도로 가져가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싸우는 도중에 화가 나서 한 것이지 합의를 해제하겠다는 의사 표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 쪽은 소장과 준비서면에서 “김현식 사장이 권진규 작품을 원작 크기로 복제하여 판매하겠다는 구상을 말했다”며 “에디션 1에서 100까지 넘버를 붙여서 소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증하거나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초 대일광업 쪽은 “별관 건축 예정 및 작품 점검을 한다”며 권진규미술관 휴관 안내문을 붙이고는 그나마 있던 권진규 작품을 다 철수했다. 실제로는 예술품 경매회사가 만든 한 대부업체에서 대일생활건강㈜이 20억원을 빌리면서 권진규 작품 전체를 담보로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현재 대부업체 창고에 보관 중이며, 약정된 기일(7월 말)까지 채무를 갚지 못하면 “케이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하여 처분”하도록 돼 있다. 이 사실은 재판 과정에서 뒤늦게 밝혀졌다. 권진규미술관이 휴관한 다음달인 지난 2월 유족은 작품 양도 금지 및 권진규미술관 명칭 사용 금지를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과 함께 작품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의 본안 소송을 냈다.
권진규 작가는 점토를 구워 만드는 테라코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인물 흉상들은 영원을 구도하는 듯한 긴 목선을 가진 게 특징이다. 사진은 중·고교 미술교과서에 실린 <지원의 얼굴>(1967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진규기념사업회 제공
외롭게 세상 뜬 뒤 작품들 떠돌아
1959년 귀국 때 한일국교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일본 부인(오기노 도모)을 데려오지 못했던 권진규는 숨질 때까지 아틀리에에 딸린 작은 방에서 고독하게 살았다. 생전에 그는 동생 경숙에게 “이 작품들이 내게는 자식”이라고 말했다. 경숙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향후의 일을 부탁한다”고 했다. 경숙은 오빠의 뜻을 받들어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오롯이 보관하고, 권진규의 체취가 묻어 있는 동선동 집과 아틀리에(2006년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도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 비운의 작가인 권진규의 삶과 예술세계를 제대로 평가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권진규미술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권진규의 마지막 모습을 최초로 목격했던 허경회도 이를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로 여겼다.
미술관을 지을 돈이 없는 유족은 예술을 사랑하는 독지가를 찾아나섰고, 2004년 하이트맥주를 만났다. 하이트맥주는 경기도 여주에 세계적인 수준의 권진규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일체를 양도받았다. 작품의 가치 등을 고려해 유족에게는 25억원을 사례금으로 지급했다. 하지만 하이트맥주는 그 뒤 진로 인수로 인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2010년 미술관 건립 계약합의를 해제했다. 하이트맥주가 부득이 포기한 권진규미술관을 짓겠다고 나선 곳이 춘천의 대일광업이었다. 권진규의 춘천고 후배이자 권진규 작품 애호가이기도 한 김현식은 하이트맥주와 동급의 미술관을 짓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소송에서 양쪽이 가장 크게 대립하는 내용은 ‘2015년 합의서’에 대한 해석이다. 유족은 “합의서 제목에서 보듯이 계약의 핵심 내용은 하이트맥주 때와 마찬가지로 권진규미술관 건립이었다. 미술관 건립을 전제조건으로 작품을 양도한 것이다. 당시 최소 100억원의 가치를 지닌 작품을 40억원에 넘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미술관 운영에 대한 약속을 위반했고, 2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설계조차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 미술관 신축 약속은 이행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전시돼 있어야 할 작품이 대부업체 창고에 있는 것은 예술품을 대하는 기본 태도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반면에 대일광업 쪽은 “당시 계약의 핵심은 미술품에 대한 매매였으며, 미술관 건립은 부차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일광업의 고위관계자는 지난 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키포인트는 우리가 40억원의 대금을 지불하고 작품들을 샀다는 것이다. 합의서에도 있듯이 작품의 소유권이 우리한테 있다. 막말로 우리가 작품을 어떻게 하든 미술관을 짓든 말든 유족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권진규 작가가 1959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손수 지은 서울 동선동 아틀리에 모습. 그가 사용하던 캔버스와 작업탁자가 놓여 있으며, 오른쪽에는 테라코타 작품을 굽던 가마도 보존돼 있다. 유족들은 이 아틀리에를 2006년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권진규 작가가 서울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말머리 조각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권진규기념사업회 제공
권진규는 1949년 무사시노미대에 입학해, 프랑스의 세계적인 조각가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에게 조각을 배웠다. 그는 1953년 일본의 재야 미전인 이과(二科)전에서 석조인 <마두>(馬頭)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학생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65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 초대전을 연 데 이어 1968년 도쿄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도쿄 전시회는 호평을 받았다. <요미우리신문>은 당시 보도에서 <지원> <춘엽니> <애자> 등 테라코타 흉상 조각에 주목하면서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깎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형태를 뜻하는 미술용어)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돼 있다”며 “이들 초상조각에 보이는 강인한 리얼리즘은 구상조각이 빈곤한 현대 일본 조각계에 하나의 자극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고 평했다.
“공공기관 나서면 무상기증할 것”
권진규 유족은 작품을 찾아올 4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권경숙이 소유하고 있던 경기도 과천의 집을 최근 팔았으며, 2015년 대일광업에서 받은 돈으로 일본에서 구입해 왔던 권진규의 다른 작품 몇개도 팔 계획이다. 소송에 이겨서 작품을 찾아오면 이제는 개인의 ‘선의’에 기대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허경회는 지난 2일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고암미술관을 대전시가 만들었듯이 권진규미술관도 강원도나 춘천시가 나섰으면 좋겠다. 공공기관이 나서면 모든 작품들을 무상으로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춘천중(현재의 춘천고)에서 학교를 다닌 권진규를 기리기 위해 춘천시도 적극적인 뜻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일광업 쪽은 자신들도 곧 권진규미술관을 짓겠다는 입장이다. 대일광업의 고위관계자는 “춘천에 있는 8층 건물에 대한 판매 대금이 이달에 들어오면 대부업체에 가 있는 작품을 되찾아 올 것이다. 미술관 지을 시간도 아직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미술관의 규모 등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그런 것까지 밝힐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시대와 불화했던 비운의 작가 권진규의 작품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법원은 가처분신청에서는 유족의 손을 들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