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사내(김명곤)와 간호사(이보희)는 서로 신세 한탄을 털어놓다가 마음을 열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희대의 괴작으로, 누군가에게는 걸작으로 남아 있을 이장호 감독의 1988년 작품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수식할 단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얼굴로 중첩되고, 인물 각자의 서사는 좀처럼 인과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장르도 정체도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한 로드무비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다.
아내(이보희)가 죽은 지 3년이 되던 해, 순석(김명곤)은 북이 고향인 아내의 유골을 안고 동해로 떠난다. 여행길에서 순석은 세 여자와 마주친다. 한 식당에서 마주친 여자는 전신마비의 노인과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동행하는 간호사(이보희)인데 순석의 죽은 아내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두번째 여자는 화투판에서 만난 여자(이보희)로 하룻밤을 함께 보낸 다음날, 원인불명으로 사망한다. 세번째 여자는 또 다른 식당에서 마주친 작부(이보희)인데 역시 죽은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다. 그녀 역시 순석과 밤을 보내고 나서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마지막으로, 간호사와 재회한 순석은 함께 새 삶을 시작하길 약속하지만 여자는 곧 신내림을 받고 순석은 망연자실한다.
이야기는 시제와 공간을 쉴 새 없이 전복한다. 고향을 잃었거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의 상처와 방황은 이보희가 1인 3역으로 보여주는 ‘그녀’를 통해 변이(變異), 혹은 전이(轉移)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를 지배하는 붉은 톤과 아귀가 맞지 않는 이미지들은 갖가지 상념을 얽어 만든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장호 감독은 ‘속하지 못한 자’, 즉 뿌리를 잃고 구천을 떠도는 인간들의 두려움과 허망함을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시제 전복으로 중무장한 로드무비를 통해 보여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상업영화를 가장한 예술영화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보희의 손바닥이 둥둥 떠다니는 엔딩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면서도, 확실한 것은 이 작품의 탄생이 <개그맨> <301 302>와 같이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국 컬트영화의 전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김효정/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