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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잔혹한 현대사를 되돌리기엔 미약했던 개인의 처절한 외침

등록 2019-08-19 11:17수정 2019-10-10 10:08

[한겨레-CJ문화재단공동기획]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47)박하사탕
감독 이창동(2000년)
사진작가를 꿈꾸던 순수한 청년 시절 영호(설경구)는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만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에 진압군으로 투입되면서 첫사랑은 어긋나고 삶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사진작가를 꿈꾸던 순수한 청년 시절 영호(설경구)는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만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에 진압군으로 투입되면서 첫사랑은 어긋나고 삶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철길에 선 한 중년 사내의 외침으로 이야기를 연다. 이것은 시작이자 동시에 끝이다. 7개의 장으로 이뤄진 플롯은 1979년부터 1999년까지 한 남자 사람의 삶을 거꾸로 추적한다.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다 화면에는 거꾸로 가는 기차 이미지가 보인다. 처음에 관객은 그게 기차 뒤 칸에서 찍은 화면을 거꾸로 돌린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머지않아 곧 알게 된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영화의 모험을 담대하게 추구하면서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뒤집은 이 서사는 관객에게 새로운 미적 충격을 안겼다.

시간을 뒤집은 연대기 속에서 이미 타락하고 망가진 상태로 등장한 주인공 김영호(설경구)의 삶에 관객은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그의 삶을 조사하는 냉정한 수사관 입장에 서게 된다. 스무살 무렵 꽃을 찍는 사진작가를 꿈꿨던 순수한 젊은이는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광주에서 경험한 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 공안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을 그만둔 뒤 방탕한 가구점 사장의 삶을 살다 증권투자 실패로 나락에 떨어진 그가 자살을 결심했을 때, 첫사랑이었던 순임(문소리)의 전갈이 온다. 주인공을 파멸시킨 세월의 정체를 궁금하게 하는 추리적 긴장감이 밴 화면은 한국 현대사 한복판을 통과한 한 남자 사람의 ‘작은 역사’를 현미경을 들이댄 세부묘사로 확대한다.

<박하사탕>은 단락마다 매우 복합적인 감정 흐름을 깔아놓아 따뜻한 느낌을 줄 것 같았던 장면이 잔인한 장면으로 바뀌는 순간을 종종 경험하게 한다. 이를테면 김영호가 광주로 출동하는 날 애인 순임이 면회를 왔다가 그냥 돌아갈 때 트럭에서 동료 군인들 틈에 앉아 군가를 부르던 영호는 뽀얀 먼지가 이는 시골길을 걷는 순임의 모습을 보지만 알은체를 할 수 없다. 그때 이후, 영호는 두번 다시 순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멜로드라마적 설정이 역사의 격랑에 묻히는 상황들을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구성으로 장엄하게 묘사한 <박하사탕>은 21세기 초입에 이룬 한국영화의 대단한 성취였다.

김영진/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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