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CJ문화재단공동기획]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47)박하사탕
감독 이창동(2000년)
사진작가를 꿈꾸던 순수한 청년 시절 영호(설경구)는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만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에 진압군으로 투입되면서 첫사랑은 어긋나고 삶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철길에 선 한 중년 사내의 외침으로 이야기를 연다. 이것은 시작이자 동시에 끝이다. 7개의 장으로 이뤄진 플롯은 1979년부터 1999년까지 한 남자 사람의 삶을 거꾸로 추적한다.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다 화면에는 거꾸로 가는 기차 이미지가 보인다. 처음에 관객은 그게 기차 뒤 칸에서 찍은 화면을 거꾸로 돌린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머지않아 곧 알게 된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영화의 모험을 담대하게 추구하면서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뒤집은 이 서사는 관객에게 새로운 미적 충격을 안겼다.
시간을 뒤집은 연대기 속에서 이미 타락하고 망가진 상태로 등장한 주인공 김영호(설경구)의 삶에 관객은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그의 삶을 조사하는 냉정한 수사관 입장에 서게 된다. 스무살 무렵 꽃을 찍는 사진작가를 꿈꿨던 순수한 젊은이는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광주에서 경험한 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 공안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을 그만둔 뒤 방탕한 가구점 사장의 삶을 살다 증권투자 실패로 나락에 떨어진 그가 자살을 결심했을 때, 첫사랑이었던 순임(문소리)의 전갈이 온다. 주인공을 파멸시킨 세월의 정체를 궁금하게 하는 추리적 긴장감이 밴 화면은 한국 현대사 한복판을 통과한 한 남자 사람의 ‘작은 역사’를 현미경을 들이댄 세부묘사로 확대한다.
<박하사탕>은 단락마다 매우 복합적인 감정 흐름을 깔아놓아 따뜻한 느낌을 줄 것 같았던 장면이 잔인한 장면으로 바뀌는 순간을 종종 경험하게 한다. 이를테면 김영호가 광주로 출동하는 날 애인 순임이 면회를 왔다가 그냥 돌아갈 때 트럭에서 동료 군인들 틈에 앉아 군가를 부르던 영호는 뽀얀 먼지가 이는 시골길을 걷는 순임의 모습을 보지만 알은체를 할 수 없다. 그때 이후, 영호는 두번 다시 순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멜로드라마적 설정이 역사의 격랑에 묻히는 상황들을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구성으로 장엄하게 묘사한 <박하사탕>은 21세기 초입에 이룬 한국영화의 대단한 성취였다.
김영진/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