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프로스랩 제공
“난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는 모든 것에 질투를 느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될 거야.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거야. 연기처럼….”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총체극’이란 이름으로 대학로 무대에서 새롭게 부활했다. 총체극은 음악, 안무, 영상이 버무려진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다. 예술과 삶,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가진 소설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영화,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돼왔다. 이번에 만들어진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형식도 새롭지만 창작진의 이름만으로도 일찌감치 기대를 모았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만든 스타 연출가 이지나의 진두지휘 아래 작곡가 정재일, 발레리나 김주원, 소리꾼 이자람, 뮤지컬배우 마이클 리, 현대무용가 김보라 등 한 작품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예술가들이 모여 기대감을 높였다. 오랜 시간 사랑받았던 고전은 ‘황홀한 역할분담’이 이뤄진 이번 무대에서 어떻게 재해석됐을까?
원작 소설은 자신의 초상화와 영혼을 바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얻게 된 도리안 그레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지금이야 오스카 와일드의 분신 같은 작품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소설이 처음 소개됐을 때 쾌락만 추구하는 인물 묘사와 퇴폐적인 내용 때문에 문단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총체극은 “만약 오스카 와일드가 2019년에 살고 있었다면 어떤 도리안 그레이를 그려냈을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원작의 구성과 인물, 대사 중 주요 모티프만 따와 19세기 사교계 인물들을 21세기 예술가들로 재해석했다.
아름다운 청년 도리안 그레이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재능 있는 모던아트 작가 제이드로 재탄생한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화를 완성한 귀족 화가 배질 홀워드는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유진으로, 아름다움이 권력이 될 수 있음을 제이드(도리안 그레이)에게 일깨우며 타락의 길로 이끄는 헨리 워튼은 뒤틀린 욕망으로 아티스트를 키워내고 버리는 기획자인 오스카로 등장한다.
총체극은 원작 속 배질, 도리안, 헨리 ‘세 남자’의 묘한 관계를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다양한 조합으로 풀어낸다. 유진 역에 이자람, 배우 박영수·신성민·연준석을, 제이드 역에 김주원과 배우 문유강을 더블캐스팅해 배우들의 다양한 조합이 유진과 제이드의 관계를 우정, 사랑 등 다양한 코드로 새롭게 보게 하는 재미를 준다. 기자가 본 회차에서 춤이 본업인 제이드 역의 김주원은 아름다운 도리안 그레이 그 자체였고, 평온함을 가진 유진 역의 이자람은 제이드의 불안한 영혼을 껴안기에 넉넉했으며, 오스카 역의 강필석은 난도가 있는 노래를 소화하며 예술을 위해 사람 목숨 따윈 중요치 않은 오스카를 맞춤 배역인 듯 소화해냈다.
무엇보다 원작과 다른 가장 큰 설정은 제이드의 심리 상태다. 원작에선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집착한 나르시시즘, 아름다움에 대한 맹목적 추구가 타락의 원인이 되지만 공연에선 이런 원작 속 코드를 현대인의 정신질환으로 연결해 풀어낸다.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유전적 양극성 장애가 예술가로서 예민해진 제이드를 타락의 길로 이끈다.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프로스랩 제공
원작이 가진 가장 극적인 요소라면 퇴폐적으로 변하는 도리안 그레이와 그 대신 늙어가는 초상화를 꼽을 수 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이지나 연출가는 비주얼디렉터 여신동, 현대무용가 김보라, 작곡가 정재일과 실험적이고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겹겹의 커튼으로 장식된 어두운 무대에 별다른 장치 없이 접이식 의자, 마이크 등을 사용해 도리안 그레이의 우울, 광기 같은 감정을 표현해낸다. 비주얼아트 전시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영상과 조명 아래 록, 클래식, 전자음악(EDM) 등 다채로운 음악이 110분간 흐르고 아름다운 몸짓이 극을 완성하며 총체극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특히나 음악이 매혹적이다. 오스카가 부르는 노래 ‘편지’ ‘꿈’을 비롯해 제이드의 뮤즈로 원작 속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시빌 베인의 넘버인 ?‘변명’도 감미로워 공연장을 나선 뒤에도 귓가에 맴돈다.
하지만 실험적인 요소가 다분한 작품인 만큼 관객들 호불호가 나뉠 것 같다. 원작의 감동을 기대하는 관객들이라면 원작을 해체해 모티프만 따온 작품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원작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내용과 형식이 난해하다고 볼 수 있다. 11월10일까지,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1577-3363.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