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23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의 정기 경매 현장에서 김환기의 대작 <우주>에 대한 호가가 진행되고 있는 광경이다. 이날 경매에서 <우주>는 131억여원에 팔려 국내 작가 작품 가운데 역대 최초로 낙찰액 100억원대를 돌파했다.
“화랑에서 왜 작품을 안 사냐고요? 하하, 요즘 돈 있고 눈썰미 있는 컬렉터치고 국내 화랑에만 다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가까운 홍콩, 대만에 마실 가듯 날아가서 번쩍한 외국 작가 그림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지난 연말 서울 북촌 전시장에서 만난 여성 중견 컬렉터 ㄱ씨는 기자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2년여 전부터 국내 화랑가 쪽에는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국외 미술관 전시나 경매사, 작품 장터(아트페어) 등의 정보를 인터넷과 인맥 등을 활용해 살피면서 ‘아웃 딜러’라고 부르는 전속 딜러들의 안내로 현지 전시 현장에서 찍은 소품을 ‘직구’(직접구매)하는 것이 즐거운 습관이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 미술시장은 대중문화 한류와는 정반대 쪽으로 흘러간다. ㄱ씨처럼 유한층 컬렉터들이 국외 미술품 직구를 선호하는 현상이 최근 수년 동안 한국 미술시장에서 유행이 됐다. 잦은 진위작 시비와 비자금 파문, 감정 주도권을 둘러싼 내홍, 불명확한 가격 산정 체계 등으로 화랑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라앉은 것이 결정적이다. 여기에 2010년 이후 바젤아트페어, 다국적 경매사 소더비·크리스티 등의 거대 미술 자본이 한국과 가까운 중화권에 잇따라 장터와 대형 경매 행사를 열었고, 세계적인 메이저 화랑의 국내 지점이 잇따라 개설되면서 직구를 부추기는 상황이 조성됐다. 부자 컬렉터들은 국외로 나가 외국 출품작을 사려고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나섰다. 서울 강남 빌딩가엔 큰손들을 국외시장에 안내하는 집사 구실을 하는 아웃 딜러들의 사무실 겸 밀실 전시장이 계속 생기는 중이다.
이런 상황 탓에 새해 국내 미술시장 분위기는 온통 회색빛이다. 컬렉터들이 국내 화랑시장을 팽개치는 흐름이 고착되자 화랑가는 밀실 거래와 미술품 장터(아트페어) 등으로 유지해온 기존 유통 시스템이 붕괴할 것이란 위기감 속에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는 처지다. 반면 한국에 진출한 페이스, 페로탕, 리먼 앤 머핀 등의 외국 유력 화랑들은 몰려드는 큰손 고객들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 쾌재를 부르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지난 연말 낸 통계를 보면, 2018년 기준 국내 미술시장 작품 거래 금액은 4482억원으로 전년보다 9.3% 줄었다. 2017년 4942억원으로 5000억원대까지 근접했다가 도로 주저앉은 격이다. 화랑가에선 지난해 상황까지 반영하면 매출 감소세가 훨씬 심각할 것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경매시장도 지난 수년 동안 국제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1970년대 국내 단색조 회화가 확연히 퇴조하면서 매출액이 뚝 떨어졌다.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의 통계치를 종합하면, 지난해 경매시장 낙찰 총액은 1500억원대다. 2000억원대를 넘긴 2018년보다 600억원 넘게 줄어 2016년 이전 수준으로 액수가 쪼그라들었다. 서울옥션, 케이옥션 양대 경매사는 지난해 창사 이래 가장 심각한 매출 부진으로 비상이 걸렸다. 단순히 순환주기로 되풀이되는 불황이 아니라 고객 선호도나 미술 콘텐츠의 상품 가치 등 시장의 기초 체력에서 역부족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3월 열린 아트바젤홍콩 전시장에 전시된 이불 작가의 설치작품 <취약할 의향>(Willing to be vulnerable). 홍콩/연합뉴스
화랑가도 외국 화랑 국내 지점들은 수익 행진을 지속하며 70년대 실험미술 작가들까지 전속 시스템 안에 빨아들이는 반면, 기존 화랑들은 대부분 전시를 접고 사실상 개점휴업한 상황이다. 국내 화랑 판매의 젖줄 구실을 해온 한국화랑협회 주최 장터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도 출품 화랑 심사 등의 내부 개혁이 난망한 상황이어서 1~2년 내 국내에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 외국 아트페어의 공세 앞에 고사할 것이란 전망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국내 화랑시장이 내놓은 작품을 컬렉터들이 외면하니 메이저 화랑도 외국 고객한테 장사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우리 화랑도 외국시장 매출 비중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화랑들 스스로 특단의 혁신책을 내놓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진단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스타작가로 거론된 양혜규 서도호 최정화 등 몇몇 작가들은 서구나 중국, 일본의 스타 작가들에 비해 시장에서의 가격은 한참 아랫 수준에 머물고 있다. 70년대 원로작가들의 단색조회화가 최근 수년간 한국 미술시장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잡았으나, 미술사적 평가나 정리가 거의 진척되지 않고, 참신한 신작들이 나올 수 없다는 한계 탓에 최근들어 거품이 급속히 꺼졌다. 뒤를 이을 대표작가나 상품이 될만한 주력 미술 트렌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다. 리얼리즘 미술, 근대미술, 70년대 실험미술 등이 한국 미술시장의 대안으로 거론됐으나 물량이 적고, 충분한 미술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는지는 미지수다. 방탄소년단으로 대표되는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며 지구촌의 글로벌 트렌드로 약진하는 중이지만 순수문화의 주력 장르인 미술분야는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고 있다는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미술판의 또 다른 축인 공공미술관은 양상이 다소 판이한 편이다. 전시 콘텐츠 면에서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주요 국공립미술관장의 기획자 중심 교체 작업이 거의 마무리돼 상당한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윤범모 관장이 취임한 국립현대미술관과 백지숙 관장이 수장이 된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틀 변화가 어떻게 전개될지가 우선적인 관심거리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리는 특별 기획전과 서예·건축 등 소외 분야 기획전을, 서울시립미술관은 이불 작가와 안상수 디자이너의 아시아 도시 순회전을 준비 중이다. 국공립미술관의 운영을 여전히 관료 공무원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관장의 교체와 전시 콘텐츠 개선이 미술관, 미술판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임기직 학예실장을 비롯한 역대 최대 규모의 정규직(39명) 공모를 연초 진행할 예정이어서 그 성패를 놓고 올해 내내 미술계의 시선이 쏠릴 듯하다. 그동안 일반 관객은 물론 미술계의 관심조차 거의 받지 못했던 지방 미술관들이 의욕적인 기획전과 국외 거장 특별전을 잇따라 여는 것도 과거엔 볼 수 없었던 변화다. 광주시립미술관의 광주항쟁 40주년 기획전(5~8월)과 개념미술 거장 리엄 길릭 초대전(9월~내년 2월), 대구미술관의 프랑스 거장 다니엘 뷔랑과 사진 거장 헬무트 뉴턴,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가 팀 아이텔 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추진 중인 비디오 거장 빌 비올라와 이우환 공간의 협력 전시 등이 눈길을 끈다.
오는 9월 외국인 감독의 지휘 아래 일제히 막을 올리는 광주, 부산, 서울, 대구의 비엔날레가 올해는 어떤 차별성을 보여주며 진화할지도 관심거리다. 젊은 작가군의 경우 온라인 에스엔에스 등을 통해 끼리끼리 모이는 소집단 소전시장 단위로만 작품과 담론들을 소통하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제도권 시장이나 미술관 등에서는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 수년째 이어져 왔다. 이들이 올해 정체된 국면을 벗어나 새롭게 약진할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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