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고요. 시즌 절반을 못 뛰지만 응원해주신 만큼 가을 야구를 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드림즈가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임동규 역을 맡은 배우 조한선의 인터뷰가 아니다. <에스비에스>(SBS)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9일, 드림즈의 4번 타자 임동규가 팬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드라마 캐릭터에 ‘과몰입’한 조한선의 인터뷰에 마찬가지로 ‘과몰입’한 팬들의 댓글이 달렸다. “절반 못 뛰지만 복귀한 이후에는 최선을 다하길”, “어릴 때 아버지와 드림즈 홈구장에 가서 임동규 선수 유니폼을 입고 응원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요즘 방송계와 시청자들은 ‘허구의 세계관’에 빠졌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태어나 예능 대세가 된 캐릭터는 물론 배우도 시청자도 드라마 속 캐릭터에 과몰입해 역할놀이를 즐긴다. 일종의 가상현실을 구축하고 캐릭터 놀이를 하는 문화가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남궁민은 배우가 아닌 드림즈의 백승수 단장으로서 한 스포츠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시청자들은 화면에 스치듯 등장한 드림즈 선수들의 등번호와 이름까지 정리할 정도의 열정을 보인다. 공개된 선수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드림즈 전력 분석에 나선 야구 팬도 있다. 드라마 제작진은 여느 구단들처럼 마스코트와 로고를 이용한 다양한 드림즈 굿즈까지 선보였다. 이내 품절 사태가 빚어졌다. 이쯤 되면 실제 야구 구단 드림즈와 백승수 단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청자들이 수많은 드라마 중 유독 <스토브리그>의 세계관에 과몰입하는 이유는 뭘까. 시청자들은 프로야구계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취재와 디테일을 그 이유로 꼽는다. <스토브리그>는 드림즈뿐 아니라 드라마 속 각 구단의 유니폼, 마스코트, 로고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만들어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드라마 방영 시점이 실제로 스토브리그(프로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인 점도 이유다. 야구 팬들은 스토브리그에 커뮤니티에 모여 ‘구단주 놀이’를 하면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어떤 선수가 필요하고,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할지 상상을 하는데, 이런 놀이 문화가 드라마 몰입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허구의 세계관에 과몰입하는 현상은 지난해부터 이어졌다. <놀면 뭐 하니?>(MBC)에서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데뷔한 유재석은 지난 연말 방송연예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데뷔 29년차인 유재석에게 왜 신인상을 주느냐는 불만은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그는 유재석이 아닌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이고, 이 세계관에 시청자들이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교육방송> 연습생 펭수의 실체 역시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비슷하거나 장신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도리어 팬들이 앞장서 “펭수는 펭수다” “눈치 챙겨”라며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극구 막았다. 이런 흐름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라면 요리사 ‘라섹’(라면 끓이는 섹시한 남자)으로 캐릭터를 확장한 유재석은 <최고의 요리비결>(이비에스)에 출연했고, 유재석의 라면집에는 <맛있는 녀석들>(코미디TV) 멤버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세계관에 몰입해 즐기는 문화가 만들어진 이유로 캐릭터 놀이에 익숙한 세대가 문화의 주 소비층이 된 점을 꼽는다.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는 “10대 때부터 게임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해져 자캐(자작 캐릭터), 관캐(관심 가는 캐릭터) 등 캐릭터 몰입을 실제처럼 즐기는 세대가 문화의 주 소비층이 됐기 때문이다. 유재석은 유산슬을 연기하며 본인도 헷갈린다고 말하지만, 이들 세대는 경계 없이 바로 몰입한다”며 “플랫폼의 경계가 무의미한 콘텐츠 경쟁 시대가 된 만큼 보수적인 지상파까지 이들 세대를 겨냥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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